취업난에 「禁男의 벽」붕괴…「여성형」직장에 남성진출

  • 입력 1998년 5월 27일 20시 14분


남자가 화장품을 판다. 남자 파출부도 더이상 낯설지 않다.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요즘, 여성만의 직종으로 여겨지던 직종에 남성들의 진출이 활발하다. 그만큼 여성들의 일자리는 줄고 있는 셈.

모은행 차장으로 근무하던 정모씨(45). 명예퇴직으로 올해초 회사를 떠난 그는 3월 태평양화장품의 방문 판매원으로 명함을 바꿨다.

정씨는 “여러군데 일자리를 알아보기도 했지만 과감히 화장품 가방을 걸머메기로 결심했다”며 “남들과 똑같아서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처음에는 ‘화장도 안하는 남자가 무슨 화장품을 파느냐’며 거부감을 보이던 주부들이 친절하게 조목조목 설명하는 정성에 탄복해 벌써 단골 고객이 꽤 생겼다”고 자랑.

태평양화장품에는 국제통화기금(IMF)사태 이후 정씨같은 남자 방문판매원이 20여명이나 늘었다. 태평양화장품의 한 관계자는 “요즘도 남성들의 문의 전화가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며 “흥미삼아 한두 명 정도 지원하던 예년과는 세태가 판이하게 달라졌다”고 말했다.

다단계 판매방식을 쓰는 화장품 회사의 경우 남성 판매원의 비중은 더욱 높다. 한해 3백여명 정도의 남성이 지원하던 한불화장품의 경우 올해는 2월 이후에만 3백26명의 남자 판매원이 새로 입사했다.

‘신세대 남자 파출부’로 유명한 주덕한씨(30). 지난해 10월부터 파출부 일을 하고 있는 그는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어야 하는 등 집안에서도 힘이 필요한 일이 많다”며 “파출부는 오히려 힘이 센 남자가 제격”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의 하루 일당은 5만원.

주씨는 “언론 매체에 소개된 후 ‘파출부가 되고 싶다’며 찾아오는 실직 남성들이 꽤 늘었다”고 전했다. 주씨는 이들에게 몇가지 질문을 던져 파출부가 적성에 맞는지 평가한 후 보조 파출부로 데리고 다니며 ‘일’을 가르치기도 한다.

가정을 방문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습지 방문교사직에도 남성들의 진출이 크게 늘었다. 방문 교사는 일의 성격상 여성에게 적합한 직종으로 인식됐던 분야.

매달 30∼40명의 학습지 교사를 뽑는 대교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30%에 불과하던 남자 교사가 올들어 50%선까지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취업난을 반영한 듯 지원자 가운데 대학원을 졸업한 경우도 꽤 있다는 것. 남성의 ‘금남(禁男)의 벽 허물기’ 공세에 여성들은 가뜩이나 좁은 취업문이 더 좁아졌다. 이런 분위기 탓에 대학 졸업을 앞둔 여대생 가운데 아예 취업을 포기하고 결혼을 서두르는 ‘조혼족’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홍석민·정재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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