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포당시 옷차림도, 말투도 같은 또래 남한 젊은이들과 차이가 없었다. 체포된 지 3년 만에 보는 김동식은 건강하고 밝아보였다. 북에 두고온 아내(치과의사)와 여섯살배기 딸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겠지만 겉으로는 평온을 되찾은 듯 했다.
―남한생활이 어떤가.
“아직도 안기부의 조사를 받고 있어 본격적으로 외부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주로 독서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삼국지와 대망을 읽었다.”
―궁금한 것은 역시 이선실과의 관계인데….
“이선실과는 90년6월초부터 10월중순까지 4개월반 남한에서 같이 지냈고 북에 들어가서도 보름간을 같이 보냈다. 본인 말로는 제주도 남쪽의 한 섬 출신이라고 했다. 해방전에 독립운동을 했고 그후엔 부산에서 남로당 거물 이삼용 밑에서 여성운동을 하다 노출되자 자진 월북했다고 했다. 6·25 무렵 태백산에서 빨치산 생활을 했고 인민군이 서울을 수복할 때 따라와 활동했다고 한다.
전쟁 후에는 북에 돌아가 공작원으로 소환됐는데 정확한 시기는 모른다. 70년초 쯤 일본에 건너가서 공작활동을 했다는 말도 들었다. 80년 초에 재일교포 신순녀의 신분을 위장해 합법적인 영주귀국 형태로 남한에 들어온 뒤 내가 데리고 갈 때까지 계속 이곳에 있었다. 언젠가 황장엽씨가 80년 10월 6차 당대회때 이선실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한 보도를 봤는데 그 때 그녀는 여기에 있었다.
이선실은 북한에 돌아간 뒤 향산 호텔에서 김일성을 1박2일간 접견하고 공화국 영웅칭호와 국기훈장 1급훈장과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그때 김일성은 직접 영웅 메달을 달아주고 스위스제 고급시계를 선물로 줬다.
김일성은 이선실을 만난 뒤 당 정치국 후보위원 자격이 있으니 계속 시키라고 말했다지만 이선실 개인만을 놓고 본다면 정치국 후보위원이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감은 아니다. 대남공작부문에 힘을 실어주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 그런 직함을 준 것뿐이다. 이선실이 북한 권력서열 22위라는 것도 여기서 얘기하는 것일 뿐이다. 노동신문에 실리는 권력서열은 대외적인 것일 뿐 실권하고는 틀린다.”
―이선실이 80년5월 남한에 들어왔는데 그해 10월 정치국 후보위원이 된 이유는….
“공로를 높이 산 것이다. 합법적으로 호적을 취득해서 영주귀국한다는 게 사실은 하늘의 별따기다.”
―이선실이 공작원 출신으로 가장 고위직이라는 것은 사실인가.
“87년까지 연락부장을 지낸 정경희(여)도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다. 파워는 연락부장인 정경희가 더 셌을 것이다.”
―이선실을 입북시키기 위해 올 때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었나.
“중요성을 부각하면서 안전하게 데리고 오라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엔 신순녀라는 이름으로 알았는데 와서 보니 이선실 이선화 등의 가명을 쓰고 있었다.”
―대남공작부서 중 이선실의 소속은 어디인가.
“90년 당시엔 사회문화부(구 연락부)였다. 직급은 공작원, 특급이다. 그녀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공작원은 없지만 공작원은 어디까지나 공작원이다.”
―92년10월 안기부 수사발표에 따르면 이선실이 대남공작을 총지휘한 것으로 돼 있는데….
“이선실이 우리를 지도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생각할 때 아니다. 아는 게 많아야 지도할 수 있는데 이선실의 지식수준은 그렇지 못하다. 이선실이 아는 공작방침은 옛날 것이어서 최근 상황은 모르고 있었다. 사실은 함께 온 조장이 이선실을 지도한 것이다.”
―김정일이 79년 이선실을 직접 통일전선부 부부장으로 발탁해 해외를 통한 침투공작을 총지휘하도록 했다는데….
“안그랬을 가능성이 많다. 통전부 부부장을 하면 차관급이어서 공식석상에 나와야 하고 매스컴에도 이름이 오르내리는데 그렇게 하다 다시 공작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선실에 대해선 북한에서도 잘 모른다. 황장엽은 당 비서라지만 이선실을 모르고 대남담당 비서인 김용순도 잘 모를 것이다. 그녀의 역할에 대해선 담당 지도원과 부과장 과장 부부장 부장 등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들과 김정일 정도만 알 뿐이다.”
―이선실이 접촉한 정계 인사들에 대해 알고 있나.
“모른다. 그녀는 젊은 사람보다 원칙에 투철하고 고지식해서 우리가 함께 만난 사람 외에는 누굴 만나는지 얘기하지 않았다.”
―황장엽씨는 남한내 고정간첩이 5만명이 된다며 남한이 허점이 많은 사회라는 말을 한 일이 있는데….
“그는 그런 내용을 알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숫자가 나왔는지 근거가 의심스럽다. 공작원 생활을 15년이나 한 나도 나같은 공작원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선실 사건은 92년10월 14대 대선을 두달 앞두고 터져 나와 당시 민주당 김대중후보측은 간첩사건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것이라고 반발한 바 있다.
“그런 부문에까지는 관여하지 않아 잘 모른다. 북이 민중당 창당을 지원했던 것은 합법적인 정당활동을 통해 국회에 진출하고 수권할 수 있는지 여부를 연구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남한의 대선이나 총선을 이용하는 문제는 북한에서 논의될 수는 있으나 관계자 한 두 사람이나 그 내용을 알 것이다.”
〈이재호·한기흥기자〉leej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