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모태는 50년 제헌헌법에 의해 창설됐던 헌법위원회다. 부통령을 위원장으로 대법관 5명과 국회의원 5명으로 구성됐던 헌법위원회는 당시 6건의 위헌법률심사를 하는데 그쳤다.
그렇지만 당시 헌법위원회는 ‘농지개혁법’과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등 2건의 법령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리는 등 헌법재판의 정착가능성을 보여줬다. 특히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 특별조치령은 6·25라는 비상사태하에서 반민족적 비인도적 범죄는 단심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했는데 헌법위원회는 헌법에 규정된 재판을 받을 권리와 3심제 원칙을 어겼다고 판정했다. 63년 3공화국헌법 시행과 함께 헌법재판 기능은 대법원으로 이관됐고 권력에 의해 시련과 좌절을 겪는 양상을 보였다. 물론 대법원은 71년 국가배상법과 법원조직법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유신헌법이 공포되면서 헌법재판 기능은 다시 헌법위원회로 넘어갔지만 완전한 ‘질식상태’에 빠졌다.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심사는 애초부터 유신헌법 부칙에 의해 배제됐다.
80년 5공 헌법도 헌법위원회를 두었지만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제정한 법률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헌법재판은 87년 6·10항쟁에 이은 9차개헌에 의해 독립된 헌법재판소가 창설되면서 제자리를 찾게 됐다.
〈김정훈기자〉jng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