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 노트]이영이/부유층의 「닫힌 지갑」

  • 입력 1998년 9월 18일 19시 28분


요즘 우리 동네 정육점 주인의 태도가 1백80도 달라졌다.

전에는 늘 고압적으로 고기를 팔다가 기분이 좀 상하면 “당신이 있으면 얼마나 있어. 나도 살만큼 산다구”라며 시비를 걸기 일쑤였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사태후 매출이 뚝 떨어지자 “손님 덕분에 먹고 삽니다. 맛있게 썰어드릴테니 자주 오세요”라며 전에없이 싹싹하게 군다.

달라진 그를 보며 이제야 모두 제자리를 찾는구나 생각되면서도 중산층 몰락을 몰고온 IMF의 위력에 왠지 우울해진다.

얼마전 전국민의 70% 가까이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믿던 때가 있었다. 모두들 부유층을 ‘졸부’라고 손가락질하면서도 그들의 과소비를 흉내냈었다.

그후 IMF와 함께 찾아온 감봉과 실업으로 중산층이 낙엽처럼 떨어져 나가고 있다. 기업들은 “소비가 살아야 경제가 산다”지만 중산층에는 ‘빈 지갑’만 남았다. 그러다보니 소비여력이 있는 부유층이 경제회복의 유일한 희망이 됐다. 이들에게 말로는 못하지만 다들 ‘제발 과소비 좀 해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눈치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부유층의 소비가 더 많이 줄었다. 얼마전 통계를 보면 고소득층일수록 IMF이후 지출감소율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소비진작책으로 각종 감세(減稅)조치를 내놨지만 이들의 소비의욕을 일깨우기에는 역부족. 많은 부유층은 ‘고금리시대엔 현금이 최고’라며 소비를 자제하는 모양이다.

일부에선 앞으로 빈부격차가 더 심해져 ‘20대80의 사회’가 올 것을 우려한다. 상류 20%의 부(富)에 나머지 80%가 빌붙어 살게 된다는 얘기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돼버린 지금 남을 위해 소비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한푼을 쓰더라도 ‘돈이 흘러갈 곳’을 따져보는 새로운 소비미학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이영이<정보산업부>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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