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觀 흔들린다]「北風」-「총격요청」 충격여파

  • 입력 1998년 10월 9일 19시 15분


20년째 민방위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박모씨(53)는 요즘처럼 곤혹스러운 때가 없다. ‘판문점 총격요청’사건이 밝혀진 이후 “이런 교육을 뭣 때문에 하느냐”는 힐난이 잇따르고 그때마다 말문이 막힌다.

예전에는 북한의 군사력이나 대남노선을 설명하면 심각하게 듣고 간혹 질문도 했다. 하지만 요즘 교육받는 사람들은 모두 졸고만 있다는 게 그의 하소연이다.

옛안기부의 북풍공작을 통한 선거개입 사건에 이어 총격요청 사건이 보도된 이후 안보분야에 대한 가치기준의 동요, 즉 ‘안보 아노미’현상이 번지고 있다. 북한이 저질렀던 끔찍한 테러조차도 정권유지를 위해 꾸며낸 일로 보는가 하면 심지어 국방의 의무조차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극단적인 ‘안보 거부론’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동훈씨(ID 참민주)는 PC통신 하이텔에 띄운 ‘KAL기 SOS도 없이 실종’이라는 글에서 ‘나름의’ 정황증거와 추론을 통해 87년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이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또 문세광의 저격사건, 8·18도끼만행과 94년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박홍(朴弘)전 서강대총장의 주사파 발언에 대해서도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조작됐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역대 정권이 국가와 정권을 혼돈하고 저질러온 안보 조작이 국민의 안보에 대한 신념을 무너뜨리고 안보 불필요론까지 확산시켰다”고 입을 모은다.

여기에 90년 이후 심각한 경제난에 빠진 북한을 더이상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없는 ‘불쌍한 이웃’으로 보고 어차피 북한은 미군이 견제한다는 식의 시각이 늘면서 안보 의식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학원생 조모씨(28)는 “이번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안보는 그저 필요할 때마다 우리를 이용했던 사악한 존재라는 생각 뿐”이라며 “예비군 훈련에 참석할 때마다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대 사회학과 한상진(韓相震)교수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우리를 지킨다는 의미의 안보는 정권 차원이 아닌 국가적 권역에서 다뤄져야 하는 문제”라며 “북한에 대한 정체성을 다시 정의하고 이를 국민적 합의로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부 사건이 왜곡 조작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무런 근거없이 조작론을 확산시키는 것은 문제”라며 “북한을 제1의 적으로 상정한 안보교육은 ‘안보 공황’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안보의 참 가치를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정비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연세대 행정학과 최평길(崔平吉)교수는 “현재와 같은 안보 혼란기에는 안보 아노미 현상뿐만 아니라 극우 보수주의 안보 논리가 되살아날 우려마저 있다”며 “안보에 대한 범국가적인 차원의 경계와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훈·권재현·박정훈기자〉dreaml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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