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이승재/情을 가꾸는 배추밭

  • 입력 1998년 10월 21일 19시 55분


지팡이를 내려 놓은 윤순근할머니(서울 동대문구 전농동·86)는 활시위처럼 굽은 허리가 모처럼 쓸모 있다고 생각했다.

“허리를 일부러 안 굽혀도 이렇게 쉽잖여….”

윤할머니는 한시간이 넘도록 구부정한 자세로 밭에 심은 수십 포기 배추의 허리춤을 노끈으로 조여맸다. 배추속이 더 싱그러워 지도록.

21일 오후 경기 고양시 용두리 은천주말농장. 서울 은천노인복지회(동대문구 장안동)가 이끄는 무의탁노인 40여명은 수확을 앞둔 배추 2천여 포기를 정성스레 돌보고 있었다.

무의탁 노인들의 배추가꾸기가 시작된 것은 지난해 8월.‘앉아서 혜택만 받을수 없다’며 농장 일을 돕겠다고나선것이다.

“올해는 그놈의 비가 무척이나 내렸어. 배추씨도 엄청나게 떠내려 갔고….”

6·25때 두 아들을 잃고 월 12만원의 지원금으로 사는 정명숙(鄭命淑·73)할머니. 만성 요통으로 누워만 있던 단칸방의 문을 박차고 나왔다.

“잘해서 한포기라도 더 거둬야지. 우리같은 사람들 김치 없으면 뭐 먹고 살아….”

무의탁노인들이 4백여평의 밭에서 거두는 배추와 무는 김치로 담겨 거동조차 불편한 같은 처지의 무의탁노인 5백여명에게 선물될 예정이다. 생활이 어려운 노인들이지만 이들에게도 남을 돕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 그래서 배추밭 가는 길은 ‘화려한 외출’길이다. 명절날에만 입는 30년된 한복을 차려입고 배추를 만지는 할머니 모습은 뒤에서 보아도 들떠있다.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 보니까 이렇게 좋지 아니여….”

생계의 유일한 수단, 하루 1만7천원짜리 취로사업도 팽개치고 따라나선 강모 할머니(74)의 말이다.

〈고양〓이승재기자〉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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