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 노트]김순덕/맥빠지는 「기본 타령」

  • 입력 1998년 11월 20일 19시 14분


“구구단을 외자.” “구구단을 외자.”

난데없이 구구단 외우기가 유행이다. TV오락프로에서 연예인 골탕먹이는데서 시작해 CF에 활용되는가 하면 어른들의 술마시는 자리에도 곧잘 등장한다.

9단도 아니고 “삼오(3×5)?”같은 쉬운 문제에서 틀리면 폭소와 함께 면박이 쏟아진다. 웃자고 하는 장난이지만 구구단 게임에서 진 사람이 나중에 무게있는 얘기라도 하려들면 “구구단도 못외면서!”하는 야유가 돌아오기도 한다. 기본도 안되는 주제에 왜 나서느냐는 얘기다.

요즘엔 초등학교 선생님이 어린이에게 “싸우지 마라” “양보해라” 등을 가르치며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제2의 건국에 동참하는 일”이라고 강조하는 공익광고도 나온다.

기본부터 다지는 일, 마땅하고도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기본을 강조하다보면 학생은 학생답게, 교사는 교사답게, 또 공무원은 공무원답게… 등등 개혁에 앞서 해야될 일이 너무 많다. 제2의 건국을 하기도 전에 진이 빠질 지경이다.

“싸우지 마라”는 물론 옳은 가르침이다. 그러나 싸울 일이 있으면 싸워야 한다. 싸움을 폭력이 아닌 논리로 하게끔 이끄는 것, 잘잘못을 가린 다음에는 화해의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일종의 ‘시스템’이다.

무조건 남에게 양보하라고 가르치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다. 몇해 전만 해도 월말이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한쪽에서는 새치기를 해서 짜증이 났던 은행을 떠올려보면 금방 안다. 문제를 해결한 것은 양보정신이 아니라 대기 번호표라는 시스템이었다.

나부터 잘하고, 너도 열심히 하고, 너나없이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쁠 건 없다. 그러나 기본만 강조하는 것은 우리 사회 시스템을 세워야할 사람들의 기만이요, 일종의 직무유기가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인군자가 아니라 아무리 나쁜 사람도 따르지 않으면 손해를 보게 만드는 시스템인데….

김순덕<문화부>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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