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 노트]이영이/거품빠진 송년모임

  • 입력 1998년 12월 11일 18시 39분


예년 같으면 송년모임이 벌써 서너번 이상 끝났을 때다. 그렇지만 올해는 아직까지 말 꺼내는 사람조차 없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주변 동료들도, 출입처 취재원들도 사정이 비슷하다고 한다. 또 모임이 있어도 주머니 사정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게 요즘 직장인들의 형편이다.

IMF체제 직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11월말이면 송년모임 스케줄을 조정하느라 바빴다. 부서 송년모임은 기본이고 동창회 동호회에 거래처 접대모임까지 몰려 ‘따블 뛰는’ 날도 적지 않았다.

송년모임은 각기 성격이 달라도 언제나 술로 끝나는 게 상례였다. 1년간 서로 무슨 한이 그리 쌓였는지, 마치 술하고 원수라도 진 것처럼 죽어라 마셨다.

우리 사회에 거품이 생기면서 일부 송년모임에서는 폭탄주가 주메뉴로 등장했다. 해가 거듭되면서 폭탄주의 제조법도 다양해졌다. 잔을 흔들어 회오리모양을 만드는 회오리주, 상사에게 충성심을 보이는 충성주, 연기 가득한 연기주, 포도주로 만드는 드라큘라주, 국자로 퍼먹는 국자주…. 열거하기도 힘든 다양한 종류의 술을 마시고 마구 망가져도 좋은 날. 다음날 아침 모두들 “송년모임이 웬수”라며 투덜대지만 저녁엔 또다른 술판이 기다린다. 이렇게 연말이 지나는 동안 가족은 당분간 ‘잊혀진 사람’이 됐다.

그런데 올해는 그런 송년모임이 없으니 일단 안심이 됐다. 그러면서도 IMF 때문에 애틋한 정마저 엷어지는 것 같아 아쉬웠다. 꼭 거창한 외식에 폭음까지 해야만 맛일까. 된장찌개에 밥 한공기면 어떻고 차 한잔이면 어떠랴. 오히려 소박한 자리에서 정이 더 깊어지는 게 아닐까. 요즘엔 각자 요리 하나씩 준비하는 부부동반 송년모임도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전례없는 경제난으로 심신이 지친 연말. 동료간의 정, 이웃간의 정이 그리워지는 때다. 송년모임도 IMF시대에 걸맞은 다양한 대안을 만들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이영이<정보산업부>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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