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영박사 타계]「여성계의 어머니」우리곁 떠나

  • 입력 1998년 12월 17일 19시 21분


“여성계의 ‘어머니’를 잃었다.”

17일 타계한 이태영(李兌榮)여사는 ‘첫 여성변호사’라는 호칭이 말해주듯 우리나라 현대여성사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평생 여권(女權)신장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해온 그는 ‘하나님과 나라와 남편과 여성’을 똑같이 섬기고 사랑한 이로 꼽힌다. 사회와 가정에서 모두 여성의 최선을 보여준 이 시대 한국여성의 ‘표상’이었다.

1914년 평북 운산군 북진읍 산골마을에서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평양정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하다가 32년 이화여전 가사과에 입학했다.

36년 이화여전을 수석졸업한 뒤 평양여자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그는 평양의 한 교회에서 일생의 반려자이자 동지인 정일형(鄭一亨)박사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두 줄의 짚으로 새끼를 꼬듯이 서로 번갈아 도와 가면서’ 46년을 해로했다. 이 부부는 주례를 서준 고 이윤영목사를 30년에 걸쳐 결혼기념일마다 찾아갈 정도로 인연을 소중히 여겼다.

46년 네 아이의 어머니이자 32세의 늦깎이로 서울대 법과대에 입학했다. 여성으로서는 최초였다. 6년 뒤인 52년 역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제2회 고등고시에 합격했다.

동기생이 모두 판검사로 임용을 받았으나 그는 남편 정박사가 야당인사라는 이유로 판사 임용을 거부당해 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56년 현 가정법률상담소의 전신인 여성법률상담소를 설립한 것을 계기로 또다른 전환을 맞게 된다. 그는 이후 40여년간 이 땅의 모든 억압받는 여성의 편에 서서 그들의 ‘어머니’를 자임했다.

그는 89년 가족법을 개정에 앞장선 것을 일생에서 가장 보람있는 일로 꼽곤 했다. 남녀의 상속지분 차별을 없애고 이혼시 재산분할청구권을 인정하는 내용 등 그의 필생의 노력들이 법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학구파였던 그는 63년부터 71년까지 이화여대 법대학장을 역임했다. 69년 55세의 나이에 ‘한국이혼연구’로 서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 74년 11월 민주회복 국민선언, 76년 3·1민주구국선언(일명 3·1 명동사건) 등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 내외와의 인연도 각별하다. 남편이 70년 대선 당시 김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은 이래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대통령 내외와 남다른 인연을 맺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정치인 김대중에게 거침없이 ‘싫은 소리’를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중의 하나였다”고 말한다.

80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대통령이 생사의 기로에 처하게 됐을 때 그가 선뜻 나서 변론을 하기도 했다.

대통령부인 이희호(李姬鎬)여사는 지난해 12월 대통령선거 직후 제일 먼저 그를 찾아가 당선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심한 치매 증상으로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을 보고 무척 가슴 아파했다고 주위사람들은 전한다.

말년에 치매로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으며 아들인 정대철(鄭大哲)국민회의부총재가 경성그룹 비리와 관련해 4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는 아픔도 겪었다. ‘고향인 평북 운산 북진읍 뒷동산에 있는 어머니의 묘소를 꼭 가보고 싶다’는 꿈도 끝내 이루지 못했다.

〈서정보·이호갑기자〉suhchoi@donga.com

[빈소표정]

이태영여사의 빈소가 마련된 삼성서울병원 15호 영안실에는 오후부터 각계에서 고인을 기리는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오후 2시15분경 김대중대통령의 조화가 가장 먼저 도착했으며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 박상천(朴相千)법무부장관 임창열(林昌烈)경기도지사 조세형(趙世衡)국민회의총재권한대행 이상수(李相洙) 김옥두(金玉斗)의원 등 20여명의 정관계 인사가 조화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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