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병익/한국「20세기학」연구 서두를 때

  • 입력 1999년 1월 18일 19시 59분


새로운 세기와 새로운 천년대를 겹쳐 만나는 장관을 맞으면서 나라마다 기념 조형물을 만들고 지구적인 이벤트를 준비하느라고 바쁘다. 이 2000년이 물리적인 시간으로는 여느 해와 다름없겠지만 그것의 역사적인, 정서적인 의미는 각별한 획기(劃期)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더구나 오늘의 급격한 변화들이 21세기에는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 것인가 하는 관심 때문에 과학과 경영, 정치 경제와 경영적인 미래 연구가 활발하게 진척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21세기 지침 찾으려면 ▼

그런데 20세기의 마지막 해를 맞으면서 이 문제의 세기에 대한 정리는 가령 지난 1백년 동안의 인물이나 작품을 선정하는 등의 저널리즘적 호기심 이상으로 깊고 진지하게는 나아가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대학에서든 학회에서든 이른바 ‘20세기학’을 설정해서 종합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고 제의하고 싶다. 이 학문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 과학의 모든 부문에 걸쳐 금세기의 발전과 성취, 실패와 교훈을 정리함으로써 1백년에 걸친 세계사를 종합하며 그 의미를 추출하고 이 시대를 관통할 시각과 평가의 체계를 정립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양하고 급격한 20세기의 전개를 주도한 원리가 무엇이며 그것은 다음 세기를 위해 어떤 지침이 될 수 있는가를 밝혀내야 할 것이다. 이 학문이 잘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장기(長期) 시대사의 학문적 성과이기를 넘어서서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며 낙관과 비관이 범벅이 되는 21세기를 향한 통찰을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종합사적인 학문의 성취는 더구나 그것이 20세기에 관한 한 결코 쉽지 않다. 1900년대의 한 세기는 기왕의 수십 세기에 비교해야 할 만큼 엄청나게 많은 사건과 지식과 변화의 양을 가지고 있어 그것들을 모두 총괄한다는 일은 아마도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더구나 그 사건들은 혁명과 반혁명, 진전과 후퇴, 휴머니즘과 야만성의 상반된 가치들이 교차하고 그 지식의 총량은 세기 초보다 몇배나 증가했으며 변화는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되는 그 이상의 격변의 연속이었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체계와 관점을 마련한다는 일은 시초부터 난관에 부닥칠 것이다. 이 과제가 더욱 어려워지는 것은 이 20세기적인 사건과 변화들이 모두 현재적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과거의 역사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의식과 삶의 내용에 그대로 투영되고 진행형으로 작용하고 있어 그 시각과 인식이 객관적이거나 통찰적이기 어렵다. 더구나 우리의 경우 학문적 분위기로는 분류사에는 상당한 능력을 키워왔지만 종합적인 시대사의 구성에는 수십 명의 연구자가 참여한 여섯권짜리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열권으로 된 광복50주년 기념 논문집(이것들도 분야사를 종합하는 정도이지만)밖에는 그 성과가 없을 정도로 취약하다.

그 주제에 대한 접근이 그만큼 어렵고 그래서 세계 전반에까지는 못미칠 망정 한국의 20세기학에는 도전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연구자도 많아졌고 그 자료도 상당히 수집되어 있는 만큼 우리의 학자들과 학문들이 제휴한다면 ‘한국 20세기학’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행되는 동안 국권의 상실과 식민 통치, 광복과 분단으로부터 관철하는 민족국가사의 성격, 전형적인 후진 농업국으로부터 왕성한 성장을 이룩해온 경제사회사적 본질, 예술과 문화사의 성취, 과학 기술사의 성과들에 대한 종합적인 시각을 구성하고 그 원리를 발견해냄으로써 금세기 한국과 한국인의 근본과 전모가 관통될 수 있을 것이며 총체사적 역사 인식을 통한 미래사를 개척할 힘을 얻어낼 것이다.

▼인간성 회복에 기여를 ▼

모두가 2000년대를 향해 흥분해 있을 때 과거 지향의 학문적 과제 제의는 다소 생경하게 보이겠지만 과거사의 현존성을 의미화함으로써 새로운 세기에 대한 우리의 미숙한 열정을 진정시키며 미래의 변화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대비토록 할 것이며 자본주의나 기술주의의 횡포에 짓밟히는 인간성의 회복에 기여할 것이어서 20세기학은 21세기 전망에 앞서 탐구되어야 할 시급한 일이다.

김병익<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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