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가 뇌물을 받으면 그것은 돈많은 사람에게 영혼을 파는 것이다.(존 T누난의 ‘뇌물의 역사’에서)
누난의 말은 관리에 대한 경고다. 뇌물을 받는 것은 영혼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하지말라는 얘기다. 그러나 거꾸로 우리들 중에 관리의 영혼을 사려고 했던 사람은 없을까.
형사정책연구원이 지난해 내놓은 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들의 54.1%가 공무원들에게 향응을 제공하고 금품을 준 적이 있는 것으로 돼 있다. 절반 이상이 공복(公僕)의 영혼을 산 셈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힘있는 관(官)이 힘 없는 민(民)에게 달라고 하기에 줄 수밖에 없는가. 그것이 우리들의 부패 역사의 전부일까.
개인사업을 하는 이모씨(36)는 이달 초순 고교 동창 4명과 함께 서울시내 모처에서 음주단속에 걸렸다. 일행은 몇차례 자리를 옮겨가면서 마셨기에 이미 만취상태였다. 그러나 단속 경찰관은 엉거주춤 서 있기만 했다. 이씨는 직감적으로 그가 무언가 다른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씨는 전에도 여러 차례 이런 일을 겪었다. 곧 ‘협상’이 시작됐다.
50만원을 받고 봐주기로 얘기가 끝나갈 무렵 돌발사태가 생겼다. 일행 중의 한 사람이 갑자기 경찰을 주먹으로 후려친 것이다. “너같은 녀석이 무슨 민중의 지팡이냐”는 호통과 함께….
분위기가 잠시 험악해졌다. 때린 친구와 맞은 경찰관이 서로 밀고 당기는 실랑이도 벌어졌다. 그러나 협상은 계속됐고 결국 액수가 더 늘어난 2백만원에 이씨의 음주운전은 없던 일이 됐다.
이씨는 다음날 돈을 모아 그 경찰관에게 건네줬다. 주먹을 휘둘렀던 친구는 일행 중 가장 많은 분담금을 내야 했다. 그날 밤 이들은 ‘부패한 한국경찰’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비리 공무원을 욕하고 주먹까지 날리면서도 결국 뇌물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심리학자들은 “자신의 위법행위를 공무원의 부정부패로 합리화시키려는 일종의 이기심(利己心)의 표출”이라고 설명한다.
서울에 근무하는 세무공무원 이모씨(43)는 관내 업소 주인들이 내미는 봉투보다 그들이 하는 말에 더 신경이 쓰인다고 털어놓는다.
“봉투를 줄 때면 그들은 언제나 ‘부담 갖지 말아요. 내 마음 편하려고 주는 것이니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공무원이 부패해야 국민이 편하다’는 얘기가 되지 않습니까.”
물은 한 사회의 가치관과 정치체계, 공(公)적 영역과 사(私)적 영역간의 관계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부패문제 전문가인 영국의 제임스 C 스콧은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보다 많은 나라, 즉 후진국이나 개도국일수록 뇌물은 늘어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힘과 권한을 갖는 공적 영역, 즉 관이 민을 압도하는 국가일수록 부패의 정도가 심하다는 것이다.
스콧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탐관오리(貪官汚吏)와 같은 말들은 뇌물과 부패의 단초가 관, 즉 뇌물을 받는 쪽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탐관오리는 또한 관존민비(官尊民卑)의 토양에서 자라났으므로 역시 관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러나 그렇다고 해서 민의 부패가 면죄되는 것은 아니다. 관이 깨끗하지 않으므로 민도 깨끗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요즘에는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무원을 범법자로 만드는 경우도 흔하다. 건설회사의 ‘전담 마크제’같은 것은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담당 공무원이 바뀌면 임직원 중 그 공무원과 연줄이 닿는 사람을 찾아내 ‘전담 마크’를 시키는 것인데 거의 보편화돼 있는 관행이다.
중하위직 공무원들에 대한 사정이 한창이던 지난해말. 서울시 한 구청 공무원은 민원인의 서류 속에 급행료 봉투가 끼워져 있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 돌려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고 공교롭게도 마침 현장에 나와 있던 암행감찰반에 적발까지 돼 지방으로 전보돼야 했다. 한 공무원의 말이다.
“요즘은 민원서류를 받으면 ‘봉투’가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민원인이 집어넣은 몇만원이 내 운명을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뇌물은 공정한 경쟁을 해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공정한 경쟁이 담보되지 않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일 수가 없다. 건강한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뇌물을 주는 사람들이 먼저 반성해 보는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서울시 감사1팀장인 최성옥(崔聖玉)계장은 행정이 서비스임을 우선 자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무원의 직무와 관련된 어떤 금품수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국민이 세금을 내고 정당한 서비스를 받는 것인데 왜 급행료나 떡값 같은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가. 공무원은 물론 민원인들도 이런 의식을 가져야 한다.”
연세대 국제교육부의 연성진(延聖眞·사회학)박사는 우리 모두가 이기주의자가 아닌 건전한 개인주의자가되어야한다고말한다.
“이기주의자는 벌금을 안내기 위해 경찰에게 뇌물을 주지만, 건전한 개인주의자는 뇌물을 요구하는 경찰을 고발하고 벌금을 낸다.”
관이 깨끗해지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민이 먼저 관의 거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부형권기자〉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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