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들의 ‘엑서더스’는 이미 시작됐다. 94년 41명의 법관이 옷을 벗은 뒤 매년 50∼60명의 법관이 퇴직했고 지난해에는 80명의 법관이 무더기로 법원을 등졌다. ‘서둘러 법복을 벗겠다’는 판사들도 수없이 많다.
그렇게된 연유를 살펴보면 여러가지다. 개개 판사의 경제적인 사정에 따른 개업 선택도 있다. 거물 전관(前官)변호사에 약하고 인사권자에 굽혀야 하는 재판 환경의 ‘전래적’ 취약성, 선진국처럼 법관의 보수를 특별대우해 ‘경제적 독립’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현실 등이 지적된다.
전관예우같은 문제나 보수 문제 등은 당장 법원의 힘으로 개선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전통으로 고착되고 전반적인 공직자 보수체계와도 연계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법관의 계급제와 승진제도 같은 문제는 이제 대법원이 손을 대야만 한다는 소리가 높다.
법원에 진급개념과 주요보직이라는 개념이 엄존한다. 판사사회에서 ‘판사’라는 직함을 가진다고 모두 동등한 판사는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법관의 승진은 ‘배석판사―단독판사―고법판사―지법부장판사―고법부장판사―대법관’의 단계를 밟는다. 지법부장판사까지는 순서대로 진급하지만 단독판사에서 고법판사가 되기 전 법원행정처 심의관을 거쳤는지 여부는 경력관리에 큰 차이를 낸다.
한 판사는 “법원행정처 심의관이란 소위 ‘엘리트 코스’로 꼽히는 자리로 동기생중 선두그룹만 갈 수 있다”며 “심지어 고법부장자리를 예약하는 효과가 있다는 수군거림이 있다”고 말했다.
다음 단계인 고법부장승진은 그야말로 판사들이 ‘명운(命運)’을 거는 결전장. 한 판사는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간다’는 말년병장이 법원에도 존재한다”며 “고법승진을 앞둔 지법부장판사들은 인사권자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으며 대법원의 판례를 답습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발탁승진’인 차관급 고법부장으로의 승진 영광을 얻는 것은 한 기수에서 10명을 넘지 못한다. ‘등룡(登龍)’명단에서 누락된 판사들은 이때 대거 변호사 시장으로 내몰린다.
고법부장승진에 실패, 개업을 한 지법부장출신 변호사는 “동기들에게 밀린 뒤 계속 부장판사를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며 “마치 인생의 패배자를 보는 듯한 측은한 눈길을 보내는 선후배법관들의 시선은 견디기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서울지법의 한 판사는 “대법관은 예외이겠지만 단독판사부터 고법부장까지는 능력과 적성에 따라 나뉘어야 하는 것이지 승진의 개념으로 봐서는 안되며 고법부장과 지법부장도 순환보직으로 바뀌어야만 법관의 관료화가 없어지고 평생 법관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한 단독판사는 “독일의 경우 우리나라의 대법관에 해당하는 연방판사를 고등법원부장과 고법평판사중에서 반반씩 발탁하기때문에 일종의 ‘패자부활전’이 있는 셈”이라며 “고법부장 승진에 탈락해도 무더기로 사표를 내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관재임명제도나 법관평가제도는 이를 폐지할 경우 사법시험합격과 사법연수원 경력만으로 평생을 보장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필요한 제도라는 시각이 많다. ‘경쟁의 원리’는 어느 집단에나 존재해야 하며 올바른 재판을 위해서도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하태원기자〉scooo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