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운동 80주년]역대대통령들과 3·1정신

  • 입력 1999년 2월 28일 19시 56분


1일은 금세기 마지막으로 맞는 3·1절 80주년. 하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3·1운동의 역사적 정치적 의미는 수많은 변곡점을 지나왔다. 특히 광복 후 3·1운동에 대한 역대 정권들의 자리매김과 시선은 그 정권의 태생 배경만큼이나 달랐다.

물론 이승만(李承晩)부터 김영삼(金泳三)에 이르는 역대 정권들에서 3·1운동은 항상 대한민국 헌정의 출발점이었다. 48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후 기념식을 거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정권에 따라 3·1운동은 대한민국의 국체(國體) 그 자체일 때도 있었고 겉치레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제헌헌법과 장면(張勉)정권의 제2공화국헌법은 전문(前文)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선언했다. 3·1운동이 건국의 기초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승만대통령은 정부 수립 이후에도 3·1운동이 건국의 모체임을 강조했다.

이같은 의미는 4·19혁명 이후 들어선 제2공화국 때도 이어졌다. 하지만 5·16쿠데타로 탄생한 박정희(朴正熙)정권은 3·1운동을 사실상 격하시켰다. 3공화국 헌법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라고는 했지만 국가의 기초는 4·19, 5·16 혁명이념임을 내세웠다. 이교수는 “5·16을 헌법전문에 넣기 위해 3·1운동과 4·19혁명을 들러리로 세운 셈”이라고 풀이했다. 그 때까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각각 개최하던 3·1절 기념식도 지방자치단체, 특히 서울시로 이관됐다.

이런 분위기는 5·17쿠데타로 집권한 80년 신군부의 전두환(全斗煥)정권 때도 비슷했다. 전두환정권 출범 직후 기념식 주관부서는 서울시에서 중앙정부로 바뀌었지만 전전대통령은 재임 7년 동안 81년 기념식에만 참석했을 뿐 나머지는 국무총리가 대신 참석했다. “3·1운동은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격하됐다”는 게 헌법학자 허영(許營)연세대교수의 얘기.

6공화국의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은 군인출신이었지만 직선 대통령임을 자부했고 그런 자부심을 헌법(“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에 반영했다. 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이 처음으로 명시된 바로 현행헌법이다.

김영삼(金泳三)정권은 출범하자마자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적통(嫡統)’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여러모로 부심했다. 김전대통령이 93년 임정요인들의 유해봉환을 서두르면서 “새 정부는 상해임정의 문민적인 정통을 이어받고 있다”며 담화문을 발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김창혁기자〉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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