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는 항일의 큰 테두리안에서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이 가담했지만 그들의 사상적 수준을 구태여 요즘 식으로 표현한다면 ‘의식화’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주의적 시각에서는 이를 너무 드러내려 하고 반대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는 이를 배제하려고 하는데 역사는 객관적으로 쓰여져야 한다.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의 분열 대립을 극복한 신간회 조직을 위시해 여러 사회 청년단체들이 이 운동을 ‘제2의 3·1운동’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전력을 경주했던 것도 이 운동의 성격을 구명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또 동학농민운동의 중심지인 호남에서 발생한 점도 유의해볼만 하다. 당시 호남지방에서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쌀증산계획 등을 내세운 일제의 토지 식량수탈이 가장 극심하게 진행됐으며, 이점이 나주 등지의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사는 그것대로 취급하되, 한민족이 주체가 되어 항쟁했던 역사를 중심으로 한국사를 기술해야 할 것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경우 이제 “광주학생들의 깃발아래 우리 민족이 모여 일제와 싸웠던 것이며 일제는 이에 저항했다”는 식으로 사관(史觀)자체를 바꾸어 보아야 한다. 이 운동을 단순히 일제에 대한 저항사 또는 일제식민통치사의 부산물로 보는 것은 올바른 역사파악이 아니다.
박영석(전 국사편찬위원장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