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기에 꽃핀 한국영화]「쉬리」등 보고 마음달래…

  • 입력 1999년 3월 4일 20시 09분


퀴즈 하나. 경제가 어려워지면 영화 관객도 줄어들까?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정답은 ‘아니오’다. 경제불황이 닥치면 영화관객은 오히려 늘어난다.특히 국산영화 관객이 두드러지게 증가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된서리를 맞았던 지난해 한국의 영화 시장이 바로 그런 경우다.

최근 전국극장연합회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극장을 찾은 관객수는 5천17만6백54명. 97년보다 5.6% 늘어난 수치다.

이 가운데 한국영화를 선택한 관객은 1천2백58만5천5백75명으로 97년보다 3.8% 증가했다. 지난해 불황의 여파로 한국영화 개봉 편수가 97년(59편)보다 16편(27%)이나 줄어든 43편에 그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증가율은 눈여겨볼만 한 수치다.

통계청 조사결과 지난해 국내 산업 생산, 출하량이 97년보다 7.1% 줄었고 내수용 소비재 판매량이 97년보다 21.4% 줄어든 전체 추세와는 확연하게 대비되는 것.

한국영화가 이처럼 호응을 얻었던 이유는 소재와 장르가 다양해지고 극적 짜임새와 연출이 탄탄해지는 등 질적 수준이 높아진 덕택. 그러나 불황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삼성경제연구소는 IMF시대가 닥친 지난해초 ‘경제환경 변화와 한국 문화산업’이라는 보고서에서 “경기가 하락하면 외화수입 감소와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갈망 때문에 문화적 동일성을 느낄 수 있는 국산영화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다”고 내다봤다.

임상심리전문가이자 영화평론가인 김수지씨(덕성여대강사·필명 심영섭)의 진단도 마찬가지.

“불황기는 현실을 쉽게 잊을 수 있는 도구로서의 영화의 기능이 가장 부각되는 때다. 불황일수록 코미디와 공포물처럼 자극적이고 황당하며 대리만족이 가능한 영화가 인기를 끈다. 지난해의 공포영화 붐이 바로 그런 경우다. 특히 IMF이후 보수적 복고적인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편지’ ‘약속’같은 복고풍 멜로영화들이 관객에게 강하게 어필할 수 있었다.”

한성렬 교수(고려대 심리학)는 “불황기에 영화가 호황을 맞는 현상은 어찌보면 불황기에 종교인구가 느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했다. 종교를 통한 ‘영(靈)적 체험’처럼 스크린에서의 ‘환상 체험’은 불황에 지친 사람들의 고단한 마음을 위로하고 심리적 도피처를 제공한다는 분석. 이는 이미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미국의 경우 1929년 대공황 직후인 30년대, 극장에 1주 8천만명씩의 관객이 몰리면서 ‘할리우드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뮤지컬 갱영화 등이 이 시기에 자리를 잡았고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가 꽃을 피웠다. 반면 미국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50년대에는 TV전국방송 실시 등의 영향으로 영화는 다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 58년 연간 관객수 11억2천만명으로 정점에 달했던 영화산업은 비약적인 경제성장이 이뤄졌던 60년대에는 끝도 없는 하향세를 보였다. 연간 1억2천만명 수준으로 떨어졌던 관객수는 거품경제가 붕괴된 92년 불황이후 서서히 늘기 시작, 요즘은 1억4천여만명선까지 회복됐다.

불황에 꽃을 피우는 영화. 특히 올해는 ‘쉬리’의 대성공에 이어 ‘건축무한 육면각체의 비밀’ ‘자귀모’ ‘유령’ ‘텔 미 썸싱’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잇따라 제작되고 있어 한국영화의 만개(滿開)가 기대되고 있다.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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