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 3월 초순 어느날 이른 아침 서울 모호텔 커피숍에서 문익환목사가 백기완(白基玩)통일문제연구소장과 계훈제(桂勳梯)씨 등 당시 대표적 재야운동가 3명에게 불쑥 방북의사를 밝혔다.
당시 백소장 등은 모두 “지금 방북하면 현 정권에 공안정국 조성의 구실을 주게 된다”며 만류했다.
그러나 10여일후 백소장은 “나 ‘거기’ 좀 갔다 올게”라는 문목사의 전화를 받게 된다. 김포공항에서 출국직전 건 전화였다.
백소장에 따르면 북한 김일성주석이 89년1월1일자 신년사에서 제안한 남북정치협상에 백소장과 문목사는 국민토론회 등 공개논의를 거쳐 참여키로 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문목사는 ‘단독방북’을 결심하게 된다. 백소장은 “당시 문목사의 방북의지는 아주 결연했다”고 회고했다.
전대협이 임수경씨 방북당시 한 명의 남학생을 함께 보내려 했다는 것도 알려지지 않은 사실. 전대협이 평양축전에 대표 밀파(密派)를 준비한 것은 89년4월말부터. 당시 2차 남북학생회담 대표단 전원이 구속되자 전대협 관계자들은 문목사 방북에서 힌트를 얻어 소수의 방북대표 파견안을 검토했다.
최종단계에서 당시 전대협의장 임종석(任鍾晳·33)씨 등은 ‘평균적 대학생’에 가까운 남녀학생 한명씩을 방북대표로 선발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정부의 통일운동에 대한 용공선전과 국민의 거부감을 피하려는 의도였다. 이런 원칙 하에 3학년때 뒤늦게 학생운동에 동참한 임수경씨가 대표로 선발된 것. 그러나 남학생은 끝내 본인의 고사로 동행하지 못했다.
임종석씨는 “최종후보에 오른 남학생은 결국 ‘마음의 준비’가 안돼 보내지 못했다”며 “이런 면에서도 당시 계획에 선뜻 동의한 임수경씨가 얼마나 담대했는지 알 수 있다”고 회고했다. 임수경씨의 당차고 발랄한 행동은 북한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귀순한 전철우(全哲宇·37)씨는 “질서정연하기로 소문난 북한의 환영행렬이 무너진 것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선대인기자〉eodl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