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義理지키기 法어기기

  • 입력 1999년 4월 21일 19시 24분


의리라는 말이 영어에는 없다. 저 유명한 ‘국화와 칼’이라는 일본인론을 쓴 루스 베네딕트여사의 발견이다. 그만큼 의리는 동양적인 삶과 문화에 닿아있다고나 할까. 동양에서도 특히 일본인들이 의리라는 말을 많이 쓰고 거기에 얽매여 산다. ‘의리 때문에 정의(正義)를 지킬 수 없다’는 말도 일본인이 흔히 하는 말이다. 베네딕트여사는 저서의 여러 쪽을 의리라는 말을 통해 일본적인 것을 파헤치는데 할애한다.

▽‘의리는 옳고 그름과 무관한 것입니다.’ 엊그제 유명을 달리한 서익원(徐翼源)변호사는 저서 ‘따뜻한 날의 오후’라는 책에 그렇게 적고 있다. 우리사회에선 의리라는 미명하에 이웃의 허물을 덮어주고 심지어 위증을 해주기도 한다. 가깝고 친하기 때문에 ‘의리’를 발휘하다 보면 법과 정의 사회질서에 반(反)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저자는 검사시절 한 미군병사가 동료 미군의 뺑소니 살인범행을 증언하는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한다. 검사석에서 “왜 굳이 친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미군 증인의 대답인즉 “친한 전우를 궁지에 몰아넣어 가슴 아프다. 하지만 진실과 정의를 절대로 감추어서는 안된다고 배웠다”는 단호한 것이었다. 우리 같으면 거꾸로 정의를 저버린 양심을 잠시 위로 하고 말 일을.

▽‘의리’는 일정한 범위 안에선 미덕이요 공감대일 수 있다. 그러나 의리는 합리(合理)와 맞서는 경우가 많다. 의리 때문에 법이 무너지기도 한다. 저자는 이제 유언집이 되고 만 책에서 말한다. “의리의 이름으로 모든 잘못을 그냥 넘어가려는 동양적 사고가 문제다. 전체를 위해 개인의 이익을 버려야 하듯, 더 큰 가치를 위해 의리를 접어 둘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김충식 논설위원〉sear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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