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
최근 정부 당국자는 삼성그룹 이건희회장의 사재출연 문제에 대해 “정부가 강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면서 “삼성자동차의 부채 규모가 과다한 만큼 총수가 자발적으로 출연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한국 풍토에서 정부가 “사재출연은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압박’으로 작용한다. “사재출연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못박지 않으면 내놓으라는 뜻이나 다름없다.
사재출연 문제는 한 개인의 재산에 국한된 차원이 아니라 우리 경제의 기본체제를 건드리는 중대한 사안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모아 경제를 끌고가는 시스템이며 이를 위해 주식회사제도가 고안됐다. 주식회사는 주주들이 일정 지분을 출자해 회사를 경영한다. 이익이 나면 배분하고 손해가 나면 지분 만큼 책임지는 ‘유한책임’이 원칙이다.
손해가 많이 나고 빚이 많다는 이유로 대주주의 재산을 출연해 이를 메우라는 것은 주식회사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주식회사 제도가 흔들리면 시장경제나 자본주의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채권은행들은 “이회장이 자동차사업의 투자를 주도했고 이회장과 삼성의 신뢰도를 믿고 신용대출을 해준 만큼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라”고 주장한다.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이해 관계자는 주주와 채권단이며 제삼자는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다. 주주와 채권단의 의사에 따라 사직당국에서 시비가 가려질 수도 있고 보유주식을 소각하는 선에서 매듭지을 수도 있다.
최근 기업관련 제도가 많이 개선됐고 총수에 대한 견제장치도 강화됐다. 시민단체가 기업활동을 감시하고 채권은행단은 중요한 투자에 대해 일일이 간섭한다. 사후에라도 공정거래위나 금융감독위가 감독권을 행사해 기업의 부당행위를 제재할 수 있다.
총수나 이사의 책임이 있다면 법과 제도를 통해 물어야 한다. 여론몰이식으로 재산 헌납을 강요하는 것은 법치국가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이런 경제 풍토에서 어떤 외국인 투자가가 한국에 투자하겠는가. 원칙을 벗어난 사재출연 강요는 한국의 대외신인도만 떨어뜨릴 것이다.
유한수(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