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증권 주가조작]이익치회장 누구인가?

  • 입력 1999년 9월 1일 19시 28분


국제통화기금(IMF)사태로 시달린 98년과 올해 이익치(李益治)현대증권 회장은 증시 급성장의 절대적인 공헌자란 평가를 받았다.

이회장이 국내 금융시장에서 일약 주목을 받으며 스타로 부상한 것은 3월. ‘한국경제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강한 메시지와 함께 발매를 시작한 ‘바이코리아펀드’가 대성공을 거두면서부터.

당시 이회장은 가는 곳마다 ‘3년안에 100조원의 자금을 모으겠다’ ‘한국증시는 3년내 주가지수 3000, 6년내 6000선까지도 가능하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증시전문가들은 ‘증시의 증자도 모르는 비전문가의 허황된 전망’이라고 일축하며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증시주변에선 심지어 ‘재벌의 힘을 빌려 장밋빛 거품만 부풀게 한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바이코리아펀드의 판매고가 두달여만에 5조원을 넘어서는 등 간접투자상품이 붐을 이루고 이들 자금이 유입되면서 주가가 급등하자 이회장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수탁고 100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목표로 발매한 이 펀드는 지난달 31일 현재 11조5450억원어치가 팔려나가 판매당시 ‘1조원어치나 팔리겠느냐’는 업계의 비아냥을 무색케 했다.

그에 대한 비난은 ‘살아있는 증시의 신화’ ‘떠오르는 여의도의 3인방’ ‘증시의 정주영’이란 찬사로 바뀌었다.

이회장은 정주영(鄭周永)현대명예회장이 한창 사업을 키우던 시절 초대 그룹회장비서실장을 지낸 이른바 현대비서실 1세대 출신. 정명예회장이 요즘 주재하는 핵심 4인방 조찬회동의 멤버이기도 하다. 그만큼 정회장의 신임이 절대적이란 얘기.

이회장은 44년 서울생으로 경기고와 서울대 상대(69년 졸업)를 나와 한국은행 입행시험에 합격하고도 현대건설에 입사, 공사판에 뛰어들었다. 현대건설 입사후 ‘왕회장’비서실장을 거쳐 현대중공업과 현대해상화재 등 계열사를 두루 거치며 경영역량을 키워왔다. 96년1월 현대증권 부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증권가에 첫발을 디뎠다. 99년1월에는 회장으로 선임됐다.

이회장은 입사직후 정명예회장의 눈에 띄어 비서실에서 오랫동안 정명예회장을 보좌했다. 그래서 안목과 저돌성 추진력이 장점인 이회장의 경영스타일은 정명예회장을 그대로 빼닮았다는 게 중평. 이회장 스스로도 “정명예회장이 결정적인 찬스에서 베팅하는 법을 보고 배웠다”고 말할 정도.

거기에 타고난 집념은 그를 ‘금융인 같지 않은 금융인’으로 만들었다. 그가 프로 뺨 치는 싱글골퍼라는 사실은 유명하지만 입문 1년만에 싱글이 됐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골프를 배울 당시 왼손 힘을 기르기 위해 왼손으로만 식사를 했고 손바닥에 피가 엉겨붙어 뜨거운 물에 녹여 클럽을 떼낸 적도 있을 정도. 그같은 집념이 업계 7위(약정규모)를 맴돌던 현대증권을 3년여만에 1위로 일으켜세웠다는 게 증권가 안팎의 평가다.

“3년안으로 여의도 금융가 정상에 현대 깃발을 꽂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켜낸 셈이다. 그는 검찰이 구속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알려져 잠적하기 직전인 8월중순경까지만 해도 주부 등 일반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한 전국순회 투자설명회에 직접 강사로 나갈 정도로 자신의 이같은 소신에 자신감을 보여왔다.

그러나 이같은 눈부신 활약과 화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조만간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게될 것으로 보여 ‘이익치신화’가 과연 여기서 막을 내리고 말지 세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용재기자〉y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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