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로씨 귀국 동승기]"대다수 일본인에게 원한없어"

  • 입력 1999년 9월 7일 20시 00분


“한일간에는 분명히 불행한 역사가 있었지만 서로를 계속 비난하기만 한다면 진실한 우호관계를 만들 수 없다.”

★투사모습 이미 사라져

권희로(權禧老)씨는 7일 귀국 비행기 안에서 ‘화해와 용서’를 말했다. 31년 전의 ‘투사 김희로(金嬉老)’는 새로운 한일관계를 강조하는 ‘온화한 권희로’로 바뀌었다.

권씨는 이날 오전10시50분 일본당국의 특별보호를 받으며 일반승객보다 먼저 도쿄발 부산행 일본항공(JAL)957편에 탑승했다. 회색 양복의 정장차림에 안경을 쓴 그는 이웃 할아버지 같았다. 31년전 권총과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인질극을 벌이던 ‘김희로’를 연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당초 기내에서 한복으로 갈아입기로 했으나 “쇼를 하는 것같아 쑥스럽다”며 한국도착후에 입겠다고 했다.

비행기는 낮 12시 정각 나리타공항을 이륙했다. 그때까지 자리에서 조용히 앉아 정면을 바라보거나 옆좌석의 박삼중(朴三中)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권씨는 비행기가 이륙하자 좌석에서 떨어진 창문을 통해 멀어져 가는 일본땅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의 눈에 언뜻 눈물도 고였다.

권씨에게 심경을 물어보았다.

★"귀국심정 몹시 복잡"

“한국에 돌아가는 심정은 한마디로 표현하지 못할만큼 복잡하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고 일본말밖에 하지 못했다. 생활습관도 문화도 일본식인 ‘반쪽 한국인’이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어머님의 교육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재일동포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이제 어머님의 유언에 따라 전혀 모르는 조국인 한국으로 돌아간다. 마음이 무척 복잡하다.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죽을 각오를 하고 총과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사건을 일으켰지만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원한이나 미움은 없다. 일본에 여러가지 추억이 있다. 70여년간 일본에서 살면서 일본의 좋은 점도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이유도 근거도 없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살았다. 내가 일으킨 사건은 재일동포의 차별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마음먹고 한 일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권씨는 일본에서 납치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지난해 일본방문때 과거문제를 말하지 않고 관용의 자세를 보여 일본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을 상기시키며 ‘일본과의 화해’를 말했다.

★"새우젓 생각난다" 회상

보도진의 취재경쟁이 과열되자 권씨는 “취재를 하려는 기자 여러분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일본국민에게 어떻게 비치겠는가. 오늘은 내 입장을 이해해달라”며 자제를 요청했다. 그는 기내 TV에 부산의 모습이 나오자 삼중스님에게 “저기가 어디입니까”라고 묻기도 했다.

낮12시40분 기내식이 시작되자 권씨는 후원자들이 미리 준비해온 한국음식으로 식사했다. 그는 “김치와 젓갈이 특히 맛있다”며 “어릴 때 어머님이 만들어주신 새우젓이 생각난다”고 회상했다.

오후 1시40분 비행기가 김해공항에 착륙한 뒤 그는 일본인 승객들에게 “오늘 저로 인해 큰 폐를 끼쳐 대단히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일본승객들은 “앞으로 조국에서 건강하게 잘사세요”라며 박수를 보냈다.

〈도쿄발 부산행 JAL 957기내〓권순활 도쿄특파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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