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물을 아끼는 성격이었지만 개를 특별히 사랑하지는 않았다. 장애인 복지에 대해 남다른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삼성맹인안내견학교에 자원하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다. 나는 도서관과 서점을 기웃거리며 안내견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개 훈련소를 찾아가 개를 훈련시킬 수 있는 자질이 내게 있는지도 자문해 보았다. 여러 복잡한 상념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공연히 창피만 당하지 않을까. 가족과 친구들은 무어라 생각할까. 그 많은 넥타이들을 이제 버려야 하나. 하지만 답은 쉽게 나왔다.
맹인안내견 보행훈련사는 시각장애인의 독립적인 보행을 돕는 맹인안내견을 훈련시키고 안내견의 주인이 될 시각장애인의 보행 교육을 하는 직업이다. 전문인력으로 선발된 뒤 뉴질랜드로 3년동안 연수를 다녀왔다. 지난해 귀국해 안내견들을 훈련시키고 시각장애인들을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매일 10여㎞씩 걷는 게 힘들었고 내 말대로 따라주지 않는, 말도 통하지 않는 개가 미울 때도 있었다. 내 교육을 받는 다른 사람의 인생에 일시적이나마 관여하는 것도 늘 버거운 일이다.
그럴 때면 뉴질랜드에서 안내견을 훈련할 때 일이 떠오른다. 훈련 막바지에는 비록 시력이 있는 정안인(正眼人)이라도 시각장애인이 된 듯한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개를 훈련해야 한다. 어느 날 건널목에서 훈련중인 안내견과 함께 서 있었다. 파란 불이 들어오고 막 건너려는 순간 한 뉴질랜드 할머니가 야위고 힘없는 손으로 내 팔목을 감싸며 “내가 길 건너는 것을 도와줄게요”라고 말했다.
스스로 몸도 가누기 힘들었던 그 할머니를 부축하다시피 해 길을 건너는 동안 왠지 모르게 감정이 복받쳐 ‘나는 시각장애인이 아니라 훈련사’라는 말을 차마 못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안내견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안내견을 귀여워해 안내견 보행지도사의 한사람으로서 무척 기쁘다. 어떤 꼬마들은 안내견을 보면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엄마, 저 개는 아무리 예뻐도 쓰다듬거나 먹을 것 주면 안되지, 그치?” 이제는 안내견이 마음대로 버스도 타고 택시도 타고 식당에도 호텔에도 들어간다.
한 지방도시에서 안내견 사용자와 함께 버스에 올랐다가 기사의 완강한 안내견 탑승 거부에 당황한 기억이 있다. 어떤 말도 듣지 않던 그 기사 아저씨를 설득한 것은 장바구니를 든 두 아주머니였다.
“아저씨, 저 개를 안 태워주면 앞 못 보는 저 사람은 어쩌란 말이에요? 우리는 반대하지 않아요.”
그 때 나는 환상을 보았다. 안내견과 함께 높은 장애의 벽을 뛰어넘는 내 장애인의 모습을, 아니 장애의 벽 자체가 허물어져 내리는 모습을. 날마다 나는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날을 꿈꾼다.
나는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내 가치관과 소신 대로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내가 나의 인생의 진정한 주인인지 회의할 때가 많았다. 이런 의구심은 맹인안내견 훈련사의 길을 선택한 뒤 사라졌다.
이동훈(삼성맹인안내견학교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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