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경영인의 하루
동아건설 고병우(高炳佑)회장은 오전 8시경 출근하자마자 간밤에 일어난 국내외 뉴스를 읽는다. 결재서류를 훑어보다보면 곧 간부회의(9∼10시). 회의를 마치면 보고와 결재가 이어진다.
오찬 상대는 주로 공사 발주처와 정관계 관계자들. 오찬 후 오후3시까지 1시간 가량이 하루 중 가장 여유 있는 시간. 시사잡지를 펼치는 것도 이때다. 쉼 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독서가 끊기기 일쑤다. 3∼5시에 4,5명의 외부인을 30분 간격으로 만난다. 5시부터는 임원 노조간부와의 협의시간.
저녁식사는 회사 임원과 하는 경우가 많다. 정기적인 모임만도 매월 10개. 집에서 가족과 식사를 하는 것은 한달에 고작 2번. 밤10∼11시에 귀가해 가판신문과 TV를 보다 자정 무렵 잠자리에 든다.
취재팀이 고회장의 8월 일정을 10분 단위로 체크한 결과 하루평균 15시간30분을 일했다. 정관계 인사 등 외부인 접견이 3시간30분으로 가장 많았고 △사내회의나 업무협의 3시간 △신문읽기 등 정보수집 3시간 △보고와 결재 2시간10분 △부서방문 및 직원면담 30분 △외부회의나 애경사 참석 등 기타 3시간20분이었다.
일하지 않는 시간 중 차량이동시간(1시간20분)을 빼면 집에 있는 시간은 7시간10분(수면 6시간)에 불과했다.
35명의 전문경영인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도 고회장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 대부분을 회사 일에 바쳤으나 고유 업무에 쓴 시간의 비중은 작았다.
결재, 업무 파악, 회의 및 협의, 현장 방문 등 경영 본업에 쓴 시간은 평균 5시간. 그러나 하루평균 3시간10분 동안 5.4명의 외부인을 만났다. 애경사 참석은 한 달 평균 5.9회, 경조사비용은 70만원이었다.
▼실력보다는 인간관계
20여년간의 미국생활을 접고 올해초 국내 회계법인 사장에 취임한 A씨. 최근 그는 국내기업 사장 몇명과 만나 대화하면서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 ‘제2의 마이크로소프트’로 주목받고 있는 시스코시스템(Syscosystem)이라는 회사 얘기를 꺼냈지만 이 회사 이름조차 들어본 사람이 없었던 것.
A사장은 “처음에는 ‘사장이란 사람들이 어쩌면 이렇게 세상물정에 어두울까’ 하고 생각했으나 겪어보니 한국에서는 공부를 할 시간 내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말했다. A사장의 독서시간은 귀국 후 일주일 평균 15시간에서 7시간으로 줄어들었다.
취재팀의 설문조사에서 국내 전문경영인들의 한달 독서량은 1.6권이었다. 최신 경제동향을 알려주는 시사잡지는 1주일에 한권꼴.
“한국 전문경영인 중에는 일선 부서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도 잘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능력보다는 근속연수나 지연 학연 등이 중시되는 한국적 경영풍토 때문인 듯하다.”(글랜 브라이스 앤더슨컨설팅 아시아금융부문책임자)
▼문제는 경영환경
설문조사 결과는 국내 전문경영인의 이같은 라이프스타일이 자신의 선택이라기 보다는 한국적 경영환경에 의해 결정된 것임을 보여준다.
그들은 △회의 주재(29명) △경영방침 구상(27명) △부서 현장 방문(20명) 등 고유업무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있었다.
반면 △민원인 접견(1명) △애경사 참석(1명) △정관계 관계자들과의 만남(2명) △외부행사 참석(3명) 등을 중시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동창회 향우회 등 지인(知人)들과의 만남이 중요하다고 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경영자로서의 능력 배양을 위한 시간 부족’을 애로사항으로 꼽은 전문경영인이 3명 중 1명꼴(11명)인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이들은 애로요인으로 △급격한 경영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29명) △정부정책 따라잡기(20명) △반(反)기업 정서(13명) 등 외부환경을 주로 지목해 구조조정기의 고민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알랭 페니코 파리국립은행한국본부장은 “선진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전문경영체제가 정착되는 것은 아니다”면서 “경영 풍토와 기업 문화를 효율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정부와 기업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CEO와 전문경영인
CEO(Chief Executive Officer)는 최고경영자로 번역되며 대표이사 사장 또는 회장을 뜻한다.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전문경영인은 ‘최대주주 및 그 친족이 대표이사 또는 상근이사로 경영에 참여하지 않은 기업의 CEO’.
압도적 대주주가 없는 선진 기업의 경우 대개 전문경영인〓CEO. 국내에서는 오너가 CEO인 경우가 대부분이나 최근 전문경영인이 늘고 있다.
▽특별 취재팀
<윤종구기자>jkmas@donga.com
<이철용기자>lcy@donga.com
<부형권기자>bookum90@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