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학련 의장이던 김근태(金槿泰·현 국민회의 의원)씨를 고문한 혐의로 고소된 이근안(李根安)전 경감은 88년 12월 잠적했다.
같은해 12월24일 오전 10시경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직위해제된 박전치안감이 숨어있던 이씨에게 ‘만나자’고 연락했다. 이날 아침 이씨 부인이 경영하는 미장원에 들렀던 박씨의 부인은 “이씨가 내일 아침 검찰에 자수하려 한다”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남편에게 알렸고 깜짝 놀란 박씨가 이씨를 급히 찾았다.
그 날 오후6시경 경기 수원시 경기도경 대공분실 인근도로 엑셀승용차 안. 박씨와 이씨, 그리고 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소속 백남은경정과 김수현경감이 머리를 맞댔다.
“사건을 잘 처리하려 했는데 미안하게 됐다. 언론에서 연일 떠드는데 너마저 개입되면 ‘본부’가 뭐가 되겠느냐. 피해 있는 것이 좋겠다.”(박씨)
“…. 좋습니다. 가족을 잘 보살펴 주십시오.”(이씨)
박씨는 이씨에게 “검찰총장과 언론사에 ‘김근태 고문사건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는 편지를 보내라”고 지시하며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 1장을 건넸다. 이씨는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도 “돈이 너무 적다”며 수표를 뿌리쳤다. 이씨는 집으로 연락해 도피자금 300만원을 마련하고 통일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얼마후 이씨의 친필 편지는 검찰총장에게 배달됐다.
그로부터 4년뒤인 92년 가을 김수현경감이 집에 숨어 있던 이씨를 찾아왔다. “고생이 많다”며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며 30분간 대화를 나눴다.
95년 5월 이씨는 부인을 박씨의 집으로 보내 “내 공소시효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박씨는 “변호사도 모르겠다더라”고 말했다.
97년 11월 이씨는 다시 부인을 통해 박씨에게 “생활비도 없다. 10년 동안 말 한 마디도 안했으니 도와달라”고 하소연했다. 박씨는 한달 후 이씨 부인을 집으로 불러 100만원권 수표 15장을 건넸다.98년12월 도피생활에 지친 이씨가 박씨에게 “자수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박씨는 대답이 없었다.
〈부형권기자〉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