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전장관 부인 연정희씨를 감싸고 있는 ‘사직동 문건’이 나왔을 때 ‘박주선’이란 이름이 튀어나온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물론 박전비서관은 “그런 보고서를 보고받지도 않았고 만든 일도 없다”고 펄쩍 뛰었고 김전장관도 24일 회견에서 “문건의 출처가 사직동팀은 아니다”며 김전장관을 보호했다.
고향은 김전장관이 장흥, 박전비서관은 보성으로 두사람 다 전남출신. 박전비서관은 93년 대검중수부 3과장으로 있을 당시 김전장관은 중수부장으로 직속상관이었고 97년 대선직전 김대중(金大中)대통령비자금사건 당시 총장이었던 김전장관은 대검중앙수사부기획관이었던 박전비서관에게 사건을 맡겼다.
박전비서관이 국민의 정부 출범이후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들어갈 때도 김전총장의 강력한 천거가 있었다고 한다. 박전비서관은 그러나 ‘영어(囹圄)의 몸’이 된 배재욱(裵在昱)전대통령법무비서관의 신세를 거론하며 한동안 고사했다는 후문.
학교로는 김전장관이 박전비서관보다 10년 선배인 두사람의 인생행로에는 닮은 점이 많다. 먼저 두사람 모두 호남출신이지만 ‘영남정권’ 시절에도 시쳇말로 ‘잘나간’ 검사들이었다.
또 정권교체 후 두사람 모두 김대통령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은 점도 마찬가지. 흔히들 특별수사검사 출신은 ‘손에 피를 묻혀 고위직에 오르기가 쉽지 않다’고들 하지만 두사람은 모두 특별수사통이면서도 승승장구했다는 점도 닮았다.
김전장관이 대검 중수부 3과장을 거쳐 중수부 1과장에 오른 것은 83년. 그로부터 꼭 10년 뒤 박전비서관도 중수부 3과장을 지냈다.
그러나 두사람의 삶의 궤적과 스타일에는 다른 점도 꽤 있다. 김전장관이 초임 검사시절 능력은 있었지만 배경이 없어 시골 검찰청을 5군데나 맴돌았던 반면 박전비서관은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한 뒤 첫 근무를 서울지검에서 한 화려한 경력의 엘리트검사다.
또 두사람 다 호남(豪男)형으로 ‘정에 울고, 정에 웃는’ 심성은 비슷하지만 김전장관이 보다 소탈하고 즉흥적인 반면 박전비서관은 치밀하고 분석적인 성향이라는 게 주위의 평.
검찰재직 당시 ‘미래의 검찰총장감’으로 통하던 박전비서관은 따르던 선배 때문에 결국 낙마하는 비운에 처했다.
〈최영훈기자〉cy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