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황혼이혼 안됩니다"…70대할머니 패소 판결

  • 입력 1999년 12월 8일 19시 34분


52년간의 결혼생활 끝에 남편의 가부장적인 순종강요에 반발해 ‘황혼이혼’ 소송을 냈다가 1심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김모씨(76·여)에 대해 대법원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민사2부(주심 이용훈·李容勳 대법관)는 8일 남편 이모씨(84)을 상대로 이혼 및 위자료 청구소송을 낸 김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원고패소 판결을 내린 2심 판결을 확정했다.

★ "부부고령등 이유 안돼"

이 소송의 2심인 서울고법은 지난해 12월 “배우자의 부당한 대우가 인정되지만 부부가 고령이고 혼인 당시의 가치기준과 남녀관계 등을 종합할 때 혼인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에 이르렀다고 보이지 않는다”며 이혼을 불허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최근 급증하는 황혼 이혼에 대한 법률적 ‘경종’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여성계에서는 ‘여성의 행복추구권’을 주장하며 반발하고 있다.

대법원은 민법상 이혼사유의 하나인 ‘배우자의 부당한 대우’를 “가혹하다고 여겨질 정도의 폭행이나 학대 또는 중대한 모욕을 받았을 경우”로 엄격하게 해석했다.

대법원은 또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에 대해서도 “부부 공동생활 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되고 혼인 생활의 강요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는 경우”라고 한정했다.

김씨는 일본에서 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다 중매로 이씨와 46년 결혼해 4남매를 뒀다.

그러나 남편은 상당한 돈을 벌면서도 결혼초부터 쌀값 등 최소한의 생활비만 대줘 어렵게 결혼 생활을 유지해왔다.

김씨는 남편의 잦은 폭언과 폭행, 지나친 의심 등으로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힘들다며 지난해 가정법원에 이혼 및 위자료 청구소송을 냈다.

김씨가 이혼 소송을 낸 직접적인 계기는 이씨의 의처증과 망상장애(치매)증세였다.

★ 최근 이혼급증에 '경종'

이씨는 고령이 되면서 의처증까지 생겨 김씨가 전처 소생의 아들과 불륜 관계를 가졌다고 우기고 집안에 감춰둔 돈을 가져갔다고 윽박질렀다.

이씨는 또 97년에는 김씨가 5000여만원을 들고 큰 딸 집으로 피신하자 절도죄로 고소하고 이혼소송을 냈다가 취하하기도 했다.

가정법원은 지난해 6월 “이씨가 가부장적인 권위를 내세워 폭언과 폭행을 상습적으로 일삼고 지나친 망상증세를 보여 결혼생활이 더 어렵다는 점이 인정된다”며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가정법원 재판부는 이어 이씨는 위자료와 재산분할금 등 7억여원을 김씨에게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이씨측은 이같은 판결에 대해 “재산분할을 노린 이혼 소송”이라며 즉각 항소했다.

대법원관계자는 이날 “이 판결은 ‘황혼’이기 때문에 이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판례로 확립된 이혼의 귀책(歸責)사유를 엄중하게 판단한 것”이라고 밝혔다.

〈정위용기자〉viyonz@donga.com

▼여성단체 "시대착오"▼

법원의 이같은 판결에 대해 여성단체들은 ‘시대착오적 판결’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여성연합) 한국여성의 전화연합 서울여성의 전화 민우회 가족과 성상담소 등은 성명을 통해 “올해 노인의 해를 맞아 노인인권문제에 대해 수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이번 판결은 이같은 논의 및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성명서는 “특히 재판부가 기존의 가부장제적 권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법의 이름으로 여성의 행복추구권을 박탈했다”고 덧붙였다.

여성연합 노주희(盧周嬉)인권부장은 “할머니의 여생과 관련해 재판부는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송두리째 빼앗았다”며 구체적 대응방안에 대한 여성계의 의견을 모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진경기자〉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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