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은 연례적으로 연말경 서울지검 출입기자단을 초청해 국내안보상황을 브리핑하는 행사를 가져왔으며 이번 행사도 이의 일환이었다.
국정원에는 취재기자들이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국정원에서 발표하는 각종 보도사항들은 서울지검 출입기자들이 취재해왔다.
국정원은 15일 방문행사에 참석할 출입기자들의 신청을 2주전에 받았으며 신원조회를 거쳐 20여명이 국정원 버스편으로 이날 오전 11시20분경 서울 강남구 세곡동 국정원청사에 도착했다.
▼ 기자단초청 안보브리핑 ▼
황재홍(黃在弘) 공보보좌관은 기자들을 신축건물인 ‘국가정보관’으로 안내했다. 2층 대회의실에서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기자들은 국정원 소개 및 북한의 실상에 대한 홍보영화를 관람했다. 그리고 12시쯤 천원장주최로 점심식사를 했다.
2층 식당에는 네개의 큰 테이블이 마련됐고 헤드테이블에는 천원장과 6명의 기자가 착석했다. 나머지 기자들은 황보좌관과 대공수사팀 간부 2명이 각 1명씩 앉은 테이블에 나눠 앉았다.
천원장과 함께 식사를 했던 사람은 6개 언론사 기자들로 출입기자단 간사와 이날 참석 기자중 언론사 근무경력이 상대적으로 많은 기자들이었다.
식사 시작에 앞서 천원장의 인사말과 백포도주 건배가 있었다.
천원장은 인사말에서 “나는 법조기자들과는 별로 인연이 없어 그런지 더 반갑다. 국정원은 많이 달라졌다. 도청 감청문제가 시끄럽지만 더이상 불법도청은 불가능해졌다. 지시하지도 않지만 지시하더라도 아랫사람들이 보안을 끝까지 지켜줄지 자신도 없다.
1년 내내 여인네들의 옷문제로 시끄러웠지만 국민의 정부는 많은 일을 했다. 경제를 되살렸고 안보문제를 확실히 다졌다”고 말했다.
문제가 된 천원장의 발언은 식사도중 헤드테이블에 앉은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 非보도 거듭 강조 ▼
이날 행사도중 황보좌관은 3,4차례에 걸쳐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임을 강조했고 기자들도 이에 동의했다. 비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을 수 있으니 기사작성에 참조는 하되 직접적인 기사는 쓰지 말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천원장 자신도 기자들과 대화하는 도중 여러 차례 비보도임을 강조했다.
이날 천원장이 밝힌 △김대통령의 과거 정치자금수수 △정형근의원 미행 △김영환사건 △고영복 전서울대교수 사건 등은 기자들이 질문을 하고 천원장이 답변하는 과정에서 언급된 내용들이다.
가령 기자들이 이근안(李根安)고문 사건을 물으면 정형근의원이 화제에 올랐고 천원장은 정의원에 대한 미행을 언급했다. 또 정의원이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김대통령의 서경원의원 1만달러 수수사건에 대해 묻자 천원장은 “대통령이 서경원의원 돈을 받았겠느냐. 대통령은 받지말아야 하는 돈을 구분할 줄 안다”며 대통령의 과거 정치자금수수 관계를 일부 설명했다.
천원장은 식사를 마친 뒤 “기자들이 궁금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자주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헤어졌다.
▼ 정형근의원 폭로 ▼
오후 2시반경 서울지검 기자실로 돌아온 기자들은 헤드테이블에 앉았던 기자들의 기억을 되살려 천원장의 발언내용을 ‘복기(復棋)’했다. 그리고 정리된 내용을 소속 언론사에 들여보냈다.
그러나 천원장의 발언내용은 다음날인 16일 오후 한나라당 정형근의원이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자신이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미행당한 일을 천원장의 발언을 인용해 폭로하면서 처음 외부에 공개되기 시작했다.
이어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원내총무가 이날 저녁 한나라당 출입기자들에게 “대통령이 97년11월 정치자금법이 개정되기 전 야당총재시절에 중앙일보 홍석현(洪錫炫)당시 사장에게서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천원장이 말했다”고 밝힘으로써 다시 공론화됐다. 천원장의 발언은 더 이상 비보도가 무의미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총무는 정형근의원에게 이같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천원장의 비보도발언이 정치권을 통해 공개되자 국정원측은 16일 밤 김대통령의 정치자금수수 부분 등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한 발언내용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기자들이 복기한 내용엔 97년 정치자금법 개정 이전에 대통령이 홍사장 돈을 받은 것처럼 되어 있으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국정원측은 17일 문제의 천원장 발언부분은 ‘대통령이 97년 정치자금법이 통과되기 전엔 홍석현(당시 중앙일보사장)이가 삼성 돈을 가지고 와서 한번 받았으며 법이 통과되는 날 가지고 온 것은 그다음 빠꾸시켰다(돌려줬다)는 거예요’라는 내용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밝혔다.
기자들은 천원장의 발언당시에는 녹음하거나 메모하지 않고 기자실로 돌아와 서로의 기억을 되살려 발언을 재생했는데 대통령이 받았다는 돈이 홍사장 돈이라고 말했는지 홍사장이 삼성 돈을 전달했다고 했는지에 대해 헤드테이블에 앉았던 기자들 사이에도 약간의 혼선이 생겼다.
한 기자는 “삼성이야기는 없었다. 삼성이야기가 나왔다면 내가 회사에 대한 내부보고에 당연히 그렇게 썼지 일부러 왜곡할 이유가 있느냐”며 국정원의 해명이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또 한 기자는 “97년 정치자금법 개정 이전에는 홍석현사장이 가져온 돈을 한번 받았다. 하지만 법개정 이후 홍사장이 한차례 가져왔었는데 거절했다. 받았더라면 큰일날 뻔했다는 취지로 천원장이 말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기자는 “삼성이야기는 기억에 없다. 하지만 홍사장이 돈을 줬다는 것인지, 다른 사람의 돈을 전달했다는 것인지는 기억이 불분명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6명의 기자 중 유일하게 한 기자는 “삼성이야기가 있기는 있었다”고 말했다.
〈김승련기자〉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