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래 과학기술의 발달은 삶의 방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아래 제시문들은 그 중 하나를 공통된 주제로 삼고 있다. 제시문들의 내용을 유기적으로 파악하여 그 논지를 정리하고, 이러한 변화가 앞으로 인간의 삶에 어떤 문제를 초래할 것인지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1) 하이네는 철도를 화약과 인쇄술 이래로 “인류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삶의 색채와 형태를 바꾸어 놓은 숙명적인 사건”이라고 불렀다. 나아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제 우리의 직관 방식과 우리의 표상에 어떤 변화가 생길 것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도 흔들리게 되었다. 철도를 통해서 공간은 살해당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다.… 이제 사람들은 세 시간 반 내에 오를레앙까지, 그리고 같은 시간 내에 루앙까지 여행한다. 이 노선들이 벨기에와 독일까지 연결되고 또 그곳의 철도들과 연결된다면 어떤 일이 초래될 것인가! 내게는 모든 나라에 있는 산과 숲이 파리로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미 독일 보리수의 향내를 맡고 있다. 내 문 앞에는 북해의 파도가 부서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동일한 하나의 변화가 지니는 두가지 모순적인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철도는 한편으로 이제까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공간을 열어 놓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사이의 공간을 없앴다는 점이다. (…) 슈테른베르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럽의 창을 통해 보이는 전망은 그것이 지닌 심층적인 차원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것은 빙 둘러 서 있으며, 어디나 채색된 평면뿐인 하나의 동일한 파노라마 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 산업화 이전 시대에 시각적 인식에 존재하던 초점심도(焦點深度)는 속도로 인해 가까이 놓여 있는 대상들이 사라져가면서 완전히 상실되어버렸다. 이는 전경(前景)의 종말, 즉 산업화 이전 시기에 여행의 본질적인 경험을 이루던 공간 차원의 종말을 의미한다.
전경을 통해서 여행자는 스스로를 자신이 지나치고 있는 풍광과 연관지었고, 자신을 이 전경의 일부분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그를 그 지역의 풍광과 일치시켰고, 여행자는 이 풍경이 펼쳐질 수 있는 경계 내에 존재했다. 속도로 인해 전경이 해체되면서, 여행자는 이러한 공간 차원을 잃게 되었다. <볼프강 슈벨부쉬(박진희 역), 철도여행의 역사>
(2)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매일 한 건물(가정)에서 다른 건물(사무실)로 무리지어 옮겨다니고, 저녁마다 이 과정을 거꾸로 되풀이했다는 사실이 50년 후에는 신기하게 여겨질 것이다. 출퇴근을 위해서는 하루 두 번 이동량이 가장 많은 시간에 맞게 구축된 수송망이 필요하다. 도로는 가장 혼잡할 때의 교통량의 하중을 수용해야 하며, 통근열차와 버스는 최대한의 승객을 수용해야 한다. 출퇴근은 시간과 건물의 수용 능력을 낭비한다. 한 건물(가정)은 흔히 낮 동안 비어 있고, 다른 건물(번화가의 가장 비싼 곳에 위치한 사무실)은 대개 밤 시간에 비어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후세들에게 이상하게 보일런지 모른다.(프랜시스 케언크로스(홍석기 역), 거리의 소멸-디지털 혁명>
(3) 우리는 이러한 시간구조의 재편성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이제야 겨우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시간패턴의 개별화가 촉진되면 노동의 지루함이 감소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고독감과 사회적 고립이 증대할 수도 있다. 만약 친구나 애인 또는 가족 모두가 각기 다른 시간에 일을 하게 될 경우 각자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새로운 서비스 기능이 생기지 않는다면, 서로가 얼굴을 마주하는 사회적 접촉은 더 어렵게 될 것이다. 동네의 선술집, 교회 모임, 학교 무도회 등 전통적인 사교의 공간은 이제 그것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다.(앨빈 토플러(이규행 역), 제3의 물결>
(4)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과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발바닥의 물집, 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 자신의 나이를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한다.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고 나자 모든 것이 변한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 밖에 있게 되고, 그는 비신체적·비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한다.(...)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 속의 빈터,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는가? 한 체코 격언은 그들의 그 고요한 한가로움을 하나의 은유로써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신의 창(窓)을 관조하고 있다’고. 신의 창을 관조하는 자는 따분하지 않다. 그는 행복하다. 우리세계에서 이 한가로움은 빈둥거림으로 변질되었는데, 이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빈둥거리는 자는 낙심한 자요, 따분해하며 자기에게 결여된 움직임을 끊임없이 찾고 있는 사람이다.(밀란 쿤데라(김병욱 역), 느림>
(5) 깁슨은 사이버 스페이스를 ‘무한한 감옥’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아무 제약도 받지 않는 사이버 스페이스 안에서 끝없이 여행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이버 스페이스는 전자기술적으로 설정된 공간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현실의 물리적 우주뿐만 아니라 가능세계와 상상의 세계까지도 전자기술적으로 표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한한 육체를 지닌 존재에게 그러한 무한성은 비물리적인 이차적 영역 속에 우리를 감금하는 감옥과 같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시스템은 물리적 공간을 표상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화성이나 깊은 바다의 광경 속으로 빠져들어가 원격현전(遠隔現前:telepresence)을 느낄 수 있도록 사이버 스페이스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이버 세계의 자료를 구축하는 일은 본래의 신체를 움직이고 있는 내적 생체에너지로부터 사용자를 멀리 떼어놓는다.(마이클 하임(여명숙 역), 가상현실의 철학적 의미>
▼해설▼
성균관대의 논술문제는 근본적으로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달이 초래하게 될 인간 생활의 변화에 대한 질문이다. 주제에 대한 제시문은 (1)볼프강 슈벨부쉬의 ‘철도여행의 역사’, (2)프랜시스 케언크로스의 ‘거리의 소멸-디지털 혁명’, (3)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4)밀란 쿤데라의 ‘느림’, (5)마이클 하임의 ‘가상현실의 철학적 의미’ 등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성균관대측은 “지난해까지 ‘맹자’, 플라톤의 ‘국가’ 등 고전에서 출제했기 때문에 올해는 오늘의 현실에서 시의성을 갖는 미래지향적인 주제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주제가 평소 수험생들이 많이 접한 논제일 뿐만 아니라 제시문의 내용 파악도 어렵지 않아 비교적 평이한 수준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
제시문의 공통된 논점은 ‘과학 기술이 전통적인 시공간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과 ‘그럼으로써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파괴된다’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중앙교육진흥연구소의 정선학 논술팀장은 “과학기술의 발달의 긍정적인 측면은 누구나 알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 장황하게 서술한 답안은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제시문의 논지처럼 부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춰 답안을 작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출제위원장인 손동현 교수(철학)는 “수험생들의 독자적인 사유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주제를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수험생이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유도했다” 고 설명했다.
<홍성철기자>sungchu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