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나는 세상]포장마차 운영 박화윤씨의 '퍼주는 장사'

  • 입력 2000년 1월 21일 20시 12분


요 며칠 그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4∼5일에 한번씩 밤 11시면 오곤 했는데. 버스운전사인 아버지 뒤를 따라 환자처럼 힘없이 걷던 여자아이. 늘 피곤해 보이는 40대 아버지는 5000원짜리 닭튀김 하나를 아이에게 시켜주고 자신은 안주도 없이 소주 한병을 비우곤 했다. 분명 엄마없는 아이일 거야. 옆에서 일 도와주는 큰딸 초원이(24)도 아이의 얼굴표정이 눈에 밟히는지 “그 ‘우울한 부녀’ 오늘은 안 왔어?” 라고 묻는다.

▼가족처럼 손님맞아▼

북한산 계곡물을 따라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빨랫골’(서울 강북구 수유1동) 버스정류장 앞에서 실내포장마차 ‘꼬꼬가족’을 2년여 운영중인 박화윤(朴華潤·53)씨. 풍요롭진 않지만 1남3녀 공부시키는 데 어려움 없던 그는 옥외광고물 납품 일을 하던 남편이 IMF위기의 직격탄을 맞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술집이라니. 평생 살림밖에 몰랐는데…. 거친 사람들이 행패라도 부리면 어쩌나.’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처음엔 손님들과 눈도 못맞추던 박씨였지만 이젠 ‘어서 오세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식구같은 단골들도 생겼다.

박씨의 포장마차는 수유동 일대에서 ‘정이 넘치는 포장마차’로 통한다. 남는 장사보다 퍼주는 장사를 하는 박씨의 넉넉한 인심 때문.

“매일 저녁 주방에선 ‘전쟁’이 벌어져요. 안주 하나라도 더 갖다주려는 엄마와 제가 싸우거든요. 한번은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사 한분이 들어오더니 달랑 소주 한병만 시키는 거예요. 순식간에 술병을 비우더니 서비스로 나오는 오이접시를 쳐들고 ‘아니, 이 말라빠진 오이를 먹으라고 내놓은 거야?’ 갑자기 소리지르는 거예요. 한판 붙으려고 했죠. 그런데 엄마는 그 사람에게 90도로 절하면서 새로 싱싱한 오이를 썰어다 주는 거 있죠.”

▼"돈 없는 설움 잘알아"▼

잔뜩 먹고 화장실 간다고 내빼는 사람이 없나, 담뱃값 100원을 깎는 사람이 없나. 그때마다 박씨는 어이없어 하는 딸에게 “놔둬라, 얼마나 돈이 없으면 그럴까. 없는 것도 서러울텐데…”라고 한다.

일 마치고 퇴근하는 근로자, 중소업체 샐러리맨,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근로자, 택시 버스 운전사들이 이곳 손님들. 대부분 1만원짜리 한 장 달랑 들고 온다.

“저 역시 오십 평생 허덕이며 살아 돈 없는 설움을 잘 알아요. 그런데 나보다 없는 사람이 더 많더라고요. 불우이웃 돕는다고 어디 성금 낼 형편은 못되고. 손해까진 안봐도 되도록 베풀고 살려고 해요.”

▼마음 가난한 이엔 술친구▼

마음마저 가난한 사람들 술친구 노릇하는 것도 박씨 몫. 며칠전엔 애인한테 배신당한 서른다섯 노처녀의 눈물 닦아준다고 밤을 꼬박 새웠다.

“세상 인심이 각박하다지만, 그래도 세상엔 착한 사람이 더 많다는 걸 장사하면서 배웠어요. 나눠주면 뭐가 오겠거니 하는 기대같은 거 없어요. 그냥 안되고 불쌍해 보이는 사람들한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한 겨울 추위가 매서운 요즘, 이 포장마차에는 훈훈한 온기가 가득하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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