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학술 모임에 가면 그 어느 때보다도 미국의 문화 제국주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심지어는 현대 문예사조나 인터넷 확산의 근저에도 미국의 은밀한 상업주의와 패권주의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일리 있는 말이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있는 이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문화 제국주의는 도처에 스며들어와 우리를 지배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시각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수 없는 것은, 그러한 태도가 자칫 문화국수주의와 더불어 외국문화에 대한 극단적인 배척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구상에 순수한 단일문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문화는 서로 겹치고 섞이면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문화의 유입에 가장 개방적인 나라 중 하나는 단연 일본이다. 일찍부터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외국문화를 거리낌없이 받아들이면서도 자국문화를 잘 보존해왔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문화상품으로 포장해 세계시장에 수출하는 데에도 성공하고 있다. 바로 그 일본이 최근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얼마 전 작가 복거일씨의 예시(豫示)적 견해로 인해 이미 한차례 영어 공용어화에 대한 논란을 경험했던 우리나라 역시 비상한 관심을 갖고 일본을 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과는 달리, 제국의 지배자에게 국어를 빼앗겨본 우리의 경우에는 외국어의 공용어 채택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외세의 잦은 침입과 식민지 경험이 형성해놓은 민족주의 그리고 유교의 유산인 보수주의는 영어의 공용어화를 쉽게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는 이제 지구촌에서 살아남고 교류하며 인정받고 경쟁하기 위한 필수 수단이 되었다. 영어의 확산을 통한 미국의 패권주의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인터넷 영어는 이제 특정국가의 언어라기보다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도구인 ‘국제어’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국제어에는 우리가 걱정할 만큼 강력한 문화적 함축도, 이념적 담론도 없다.
사실 그보다 더 심각한 사안은 그 많은 시간과 정력과 금전을 투자하면서도 별 효과를 얻지 못하는 현행 영어교육의 문제점일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너무 쉬워 변별력을 상실한 수능시험 때문에 대학에 들어오는 학생들의 영어수준은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미 많은 대학들과 학과들은 면접시험 때 별도로 영어 능력 테스트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다 보니 차라리 영어 본고사를 부활시키거나 영어로 면접을 하면 학생들의 영어실력이 크게 향상되지 않겠느냐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모든 정보가 영어로 전달되고 교환되는 오늘날, 영어실력은 개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국가경쟁력과도 직결된다. 사실 그 동안 우리 대표들의 영어가 짧아서 국제 관계에서 망신당하거나 손해를 본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또 그 동안 단지 영어를 잘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오해와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왔던가. 많은 사람들이 영어의 공용어화에는 반대하면서도, 막상 자신들의 자녀만큼은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 하기를 바라고 있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효율없는 영어교육 개선 필요▼
영어를 공용어화하는 것은 마치 예술을 상품화하는 것만큼이나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문화나 예술이 상품화되고 세계 도처에서 영어가 공용어처럼 쓰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문제는 21세기 국제경쟁 사회에서 그러한 시대적 변화를 외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어를 국어처럼 잘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우리말과 우리 문화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폴 리쾨르의 말을 상기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자국의 고유문화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세계문명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절실한 문제이다.
김성곤<서울대교수·미국학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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