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해태제과 고객만족실에 한 주부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41세의 주부’라고 자신을 소개한 박충희씨(경기 고양시 일산구)는 ‘23년 전의 약속’에 얽힌 사연을 차분히 써내려갔다.
박씨가 성신여대 부속여고 2학년에 재학중이던 1977년. 박씨와 같은 반의 학생들은 김학민 수학선생님과 ‘작은’ 내기를 하나 했다. 체육대회 때 박씨의 반이 어디에 앉게 될지 맞히는 내기였다. 내기에 지는 쪽이 부라보콘을 사기로 했다. 결과는 학생들의 승리. 빨리 사달라고 아우성치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날짜는 정하지 않았다”며 칠판에 ‘2000년 2월22일 오후2시 덕수궁 앞으로’라고 썼다. 학생들은 책상을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함성을 질렀지만 선생님은 요지부동.
박씨는 “그때는 2000년이 너무나 까마득하게 느껴져 과연 그 날이 올까 라고 생각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약속 날짜가 손아귀에 잡힐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박씨는 편지에서 “머릿속에 늘 그날 약속을 생각하면서 해태가 부라보콘 생산을 중단할까 걱정돼 아이스크림을 사먹을 때면 이 제품만 골라집었다”고 전했다. “해태가 부도났을 때는 제가 어쩐다고 부도를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나라도) 사먹자는 심정으로 겨울에도 열심히 아이스크림을 사먹었습니다.”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자 박씨는 또다른 걱정에 빠졌다. 과연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23년 전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 그동안 수소문을 통해 선생님이 건대부고로 옮겼다는 사실을 확인한 박씨는 며칠전 용기를 내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씨는 “김학민선생님께서 그날 일을 떠올리며 너무나 반갑게 대해주셨다”면서도 “그날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하셨는데…”라며 걱정을 했다.
박씨는 친구들이라도 만나러 그날 꼭 약속장소에 나갈 생각이다. “선생님이 그 시간에 못나오시면 친구들과 댁으로 찾아가서라도 꼭 얻어먹을 생각입니다.”
편지는 “이렇게 오랫동안 생산해주셔서 감사합니다”란 말로 끝을 맺었다. 해태제과 직원들은 22일 오후2시 아이스크림통을 갖고 덕수궁 앞으로 나가기로 했다. 당시 100원이던 부라보콘이 지금은 700원으로 올라 세월이 꽤나 흘렀음을 말해주고 있다.
<금동근기자>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