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校 점심시간 '난장판'…학교급식 식당도 없이 교실서

  • 입력 2000년 4월 26일 18시 57분


26일 낮 12시 20분경 서울 S고 복도. 점심시간을 앞두고 급식당번 학생들이 동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밥과 국 등의 음식물이 담긴 통을 나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12시 40분.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학생들이 교실 뒤편에 설치된 급식대로 몰려들면서 모든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빨리 배식받기 위해 새치기하는 학생도 있었다. 교실 바닥은 이들이 흘린 음식물로 몹시 지저분해졌다.

같은 시간, 이 학교 매점에는 점심을 빵이나 라면으로 때우려는 학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1학년 이모군(16)은 “점심시간이면 교실이 ‘전쟁터’가 되고 밥도 맛이 없어 매점을 이용한다”며 “나같은 학생이 한 반에 5, 6명은 된다”고 말했다.

서울 K고는 교실의 혼잡을 피해 강당에서 학년별로 시간을 정해 급식하는 경우. 이 학교의 한 교사는 “같은 시간에 일부 학년은 수업을, 일부 학년은 식사를 하다 보니 수업분위기가 엉망이 되기 일쑤”라고 말했다.

▼"대선공약 무리하게 추진"

지난해부터 고교 급식이 전면 실시되면서 각 고교 교실마다 점심시간이 이처럼 난장판으로 변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공약을 지키기 위해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급식을 추진하다보니 빚어진 현상이다.

현재 급식이 실시되는 서울시내 239개 고교 가운데 학생 식당이 없어 교실에서 배식하는 학교는 113개교로 절반 가까이 된다.

같은 날 서울 O고 2학년7반의 점심시간. 40여명의 학생들이 교실에서 점심식사중인 가운데 7,8명의 학생들이 숟가락만 들고 다니며 급우들의 점심을 빼앗아 먹고 있었다.

2학년 김모군(16)은 “집에서 급식비를 받아 휴대전화나 PC방 사용료로 쓰고 교실을 돌아다니며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며 “처음엔 선생님들이 다른 반 학생이 드나드는 것을 막았지만 요즘은 포기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만난 한 학부모는 “아이가 점심식사를 거르는 일이 많다고 해서 아예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갖고 학교로 오곤 한다”며 “다음달부터는 아예 급식 신청은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3명중 1명꼴 급식 안받아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급식대상 고교생 3만8000여명 가운데 급식을 받지 않는 학생은 3명 가운데 1명꼴인 1만4000여명. 이들 가운데 일부는 도시락을 지참하지만 김군처럼 ‘무전취식’ 하는 학생도 상당수다.

음식의 질과 위생상태에 대한 신뢰가 낮은 것도 학생들이 학교급식을 회피하는 요인. 대부분의 학교에서 2000원 가량의 식대에 1식1국3찬의 식사를 제공하지만 신세대 학생들의 입맛에 맞는 메뉴를 갖춘 학교는 거의 없다.

이와 함께 서울시교육청이 지난해 시내 132개 고교를 대상으로 위생상태를 점검한 결과 22.7%인 30개 학교의 각종 위생관리가 최하위 수준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서울 S고 교감은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급식을 하다보니 부작용이 있는 것 같다”면서 “그래도 우리 학교는 급식이 잘 되는 편이어서 인근에서 모범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홍성철기자>sung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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