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부의 '주식중독' 체험…본전탓에 발도 못빼

  • 입력 2000년 5월 3일 19시 55분


“언니, 내가 뭐랬수. 2만5000원 뚫었잖아.”

“아까 살 걸, 100원 더 먹으려다가 망했다.”

2일 오후 2시경. 서울 강남에 있는 한 PC방. 40대 부인 세 명이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종목별 주가동향을 쫓느라 여념이 없었다. 2시30분. 폐장시간이 가까워오자 이들의 휴대폰은 더욱 바빠졌다.

“김대리, 팔아야 돼, 말아야 돼? 내일은 괜찮을까?”

전화를 끊은 주부 Y씨(43)는 증권사 직원의 말이 영 못미더운 듯 ‘팔아치울 걸…’ 하는 후회의 표정이 역력하다. 2시45분. 다른 종목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갑자기 ‘그래 지금이야’ 하며 매도주문을 냈다. 1000주를 한꺼번에 팔아치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이구, 100원 또 오르네.’ 한탄이 절로 나왔다. “몇 초만 참았어도 더 많이 남길 수 있었는데….”

▼15년전 5000만원 깡통경험

오후 3시. 장이 끝나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래도 오늘은 50만원 남겼다’는 말에 기자가 놀란 표정을 짓자 “무슨 소리, 며칠 전엔 100만원 깨진 날도 있었는데. 그런 날은 누렇게 뜬 채 아무 일도 못한다”고 했다.

Y씨의 ‘주식 경력’은 꽤 길다. 15년 전 3000만원을 들고 2년 정도 주식에 매달렸던 적이 있다. 3000만원이 7000만원으로 불어났을 때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라는 생각에 매일 매일이 행복했다고 한다. 백화점에 가서 당시 12만원짜리 청바지를 색깔별로 6벌이나 한꺼번에, 그것도 정상가로 산 일도 있었다. ‘돈벌기가 이렇게 쉽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밤잠 못자고 신경쓰는 게 싫어 7000만원이 1억원만 되면 ‘손 털자’고 다짐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과감하게 증권사로부터 5000만원을 빌려 투자했던 것.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빚 5000만원만 고스란히 남았다. 죽고 싶었다. 이혼, 자살, 가출 등 생각해보지 않은 게 없었다. 이민계획까지 구체적으로 세웠었다. 다행히 여유있는 친정에 손을 벌려 급한 불은 껐다. ‘돈과는 인연이 없는 팔자이니 죽어도 주식투자 안한다’고 재삼 다짐했다. 그렇게 10여년이 흘렀다.

Y씨의 다짐은 1년전 속절없이 무너졌다. 재벌 증권사 사장이 주가가 곧 2000이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신문 방송에 연일 벼락부자 얘기가 실릴 때도 잘 버텼다.

그러나 은행원이던 후배 남편이 작은 자본운용회사로 옮겨 하루아침에 연봉 1억원짜리 ‘귀한 몸’이 되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식의 ‘주’자도 모르던 이웃들이 주식투자로 수천만원 벌었다는 얘기도 들렸다. 목돈 모아 고작 이자 7∼8%짜리 통장에 잠재워 두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작년 남편몰래 또 손대

“세상이 다 주식에 미쳐 돌아가도 당신은 손대면 안된다”는 남편의 협박성 다짐이 있었건만 어느 날 자고 일어나 조간신문의 주식 시세를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 주식에서 깨진 돈은 주식에서 찾아야지.’

Y씨는 한 종목을 찍었다. 2만5000원이었다. 며칠을 기다려 2만500원이 된 날 2000만원 어치를 샀다. 다음날 2만1500원으로 올랐다. 하루하루 처절했다. 오전 오후에 한번씩 전화로 시세를 알아보다 아예 PC방으로 출근을 했다. 머릿속에는 곱셈만 오락가락했다. 얼마 잃었다, 얼마 땄다, 그것만 생각났다. 어느새 2만5000원을 넘어섰다. 마침내 2만7000원을 넘어선 날 과감히 팔아치웠다.

▼"아예 PC방서 살아요"

너무 행복했다. ‘그래, 이대로라면 10년전 까먹은 5000만원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Y씨는 ‘번 돈’을 고스란히 코스닥에 투자했다. 그러나 2일 현재 Y씨의 잔고는 -2000만원. 최근 폭락 장세에 무참히 깨지고 있다.

“오르면 오르는 대로, 내리면 내리는 대로 피가 마른다. 10년 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완전히 도박판이다. 다른 사람들한테 절대로 주식에 손대지 말라고 권한다. 그래도 나는 안전투자를 해서 몇 억씩 손해본 사람들보다 나은 편이다.”

“그렇게 비싼 수업료를 내고도 남편 몰래 다시 주식에 손댄 이유가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Y씨는 이렇게 말했다.

“본전 때문이다. 한번 상투를 잡았기 때문에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재미도 있다. 이렇게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신문에 보니 나 같은 사람을 스톡홀릭(stockholic·주식중독)이라고 하더라. 하하하.”

작년 말 현재 상장기업과 코스닥 등록법인의 주식투자인구는 약 1000만명이다.

<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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