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의원 중 손꼽히는 재산가인 K의원은 지역구에 중앙당 관계자들이 내려오면 단골 C룸살롱의 방을 여러 개 잡고 한턱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때그때 유행하는 음주 기법을 소개하면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물론이다. 야당의 Y전의원은 맥주컵에 양주를 가득 따른 수소 폭탄주를 돌려 좌중을 제압하는 스타일.
낮이면 나라와 민족을 논하다가도 밤이면 습관적으로 술집을 향하는 정치인들. 그것도 룸살롱이나 접대부가 있는 술집에 가서 폭탄주나 회오리주 돌리기 등의 기괴한 주조법까지 동원하며 질펀하게 술판을 벌여야 성이 찬다.
술집도 권력부침에 따라 권력이동이 나타나 노태우(盧泰愚)정부 시절엔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C와 종로의 B에 실세들이 드나들었고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엔 서울 강남구 역삼동 R호텔 뒤 D룸살롱이 정권실세들이 가는 집으로 소문날 정도다.
정계뿐만 아니라 관계 재계 문화계 등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 2월초 부산 D동사무소 동장실. 근무시간이 끝나자마자 술자리가 벌어졌다. 직원들은 안주와 함께 맥주 소주 막걸리를 속속 들여왔고 맥주와 소주를 섞어 마시던 동장 E씨는 옆자리에 앉은 여직원 F씨의 허벅지를 만지려 하면서 귀엣말로 노골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했다. 여직원은 놀라 그 자리를 뛰쳐나왔고 결국 고민 끝에 여성특별위원회에 시정을 요청했다. 동장은 결국 파면됐다.
회사원 S씨는 "출근하면 술 냄새를 가득 풍기는 상사들이 어젯밤 누구누구와 폭탄주를 몇 잔씩 마셨다며 마치 무용담처럼 자랑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강남대 지광준(池光準·법학)교수는 "여성이 남성에게 술을 따르고 접대해야 한다는 인식은 여성을 비하하고 노리갯감으로만 대해온 잘못된 성문화, 특히 기생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남성사회에는 남들보다 술 잘 마시고 여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호쾌하고 사나이답다고 평가하는 그릇된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술 권하는 사회'는 술 못 마시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다. 부산대 박재환(朴在煥·사회학)교수는 "한국적 술 문화의 특징은 남자들이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주된 방식으로서 술자리를 찾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통음을 한 사람과 술 한잔 같이하지 않은 사람간에는 엄청난 장벽이 쳐지고 지연 학연 못지않게 '알코올 연줄'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로 인한 문제가 노출되면 "술김에…" "기억이 안 난다"고 얼버무리면 간단하다. 우리 사회는 음주로 인한 추태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기 때문이다.
▼"술때문에…"는 변명 불과▼
여성학자 김혜선(金惠善·북부여성발전센터소장)씨는 "가정폭력을 술 탓으로 돌리는 남편들이 많지만 변명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술에 취해 실수했다고 하는 장원(張元)전총선연대 대변인의 성추행사건이나 386세대 정치인의 술판사건 역시 이같은 남성들의 보편적 술 문화의 단면을 보여준 것"으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 성상담소 유경희(柳京姬)상담실장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386세대 정치인이 다른 정치인들처럼 술자리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여성을 사물화시켰다는 데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며 "이번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여성을 비하하고 폭력적으로 치닫는 술자리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진경·윤영찬기자>kjk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