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성낙/'低價'정책'이 저질藥 부른다

  • 입력 2000년 6월 4일 19시 39분


국내에서 유통되는 약품의 1%만 약효에 이상이 있다고 해도 큰 문제인데 상당수의 약이 약효가 떨어진다는 사실은 의료소비자인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처하는 보건복지부의 ‘그래서 어떻다는 거냐’는 식의 반응은 우리를 더욱 아연실색케 한다.

▼업계 개선요구 당국이 묵살▼

최근 동아일보에 보도된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약효시험결과는 검사방법으로는 허술하기 그지없는 약효 동등성 시험방법에 의해 나온 결과인데 의료계가 요구하는 훨씬 까다로운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을 적용한다면 과연 결과가 어떨지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문제의 핵심은 국내 의료계나 제약업계가 오래 전부터 이 문제를 누차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당국은 지금껏 이를 묵살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는 데 있다.

바로 1년 전 보건복지부는 국내에서 유통되는 약품에 적용시켜 온 보험 약가를 거의 일률적으로 30% 인하시켰다. 그리고는 부정의 온상이었던 약품 유통관련 비리를 근본적으로 손본 것처럼 홍보까지 했다. 시민단체와 언론도 그간에 떠돌던 비리와 거품을 제거한 보건복지부의 쾌거에 묵시적으로 찬사를 보냈다. 그때 국내 제약업계는 공개적으로 제대로 변명도 못하면서 정부지침을 수용했다.

왜 이들이 속앓이만 하고 있었을까. 당시 국내 제약업계는 국내약값은 선진국에 비하면 약 40%가 싸다는 사실만 아주 조심스럽게 발표했을 뿐이다. 여기에 바로 국내 제약업계의 ‘아킬레스건’이 숨어 있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2만5000여 종의 약품은 몇몇 백신제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외국에서 물질 특허료를 내고 원료를 수입해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국내 약가가 특허와 원료를 제공하는 수출국의 약가보다 쌀 수 있는지 의구심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런 일은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겠느냐는 식의 제약회사 윤리수준과 약의 품질관리상 지켜야 할 기준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감독기관(식약청)의 눈높이가 어울리면 불가능할 것도 없는 일이다.

제약회사는 약품 공시가격에 맞추기 위해 선진국에서 순도가 높은 원료를 구입하는 것은 포기하고 중국 인도 등에서 값싼 원료를 수입하거나 원료의 약효기간인 반감기가 다된 것을 헐값에 사들여 조제하고 있다는 말이 풍문이길 믿고 싶다.

순도가 최상이 아닌 원료로 제조된 약이 환자에게 투입되면 약효가 떨어지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고 인체 여러 기관에 섭취되는 과정에서 간 신장 및 뇌 조직세포들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최고의 품질, 따라서 고가의 약을 환자에게 처방하는 것이 의사의 기본 윤리임에도 불구하고 행정당국은 시민단체의 힘을 업고 왜 고가의 약을 선호하느냐고 의료계를 질타하고, 모든 의료비리의 표본인 것처럼 여론을 호도해 왔다.

▼국민부담 늘더라도 좋은 약을▼

의료보험관리공단도 속칭 동일성분 동일함량의 저렴한 국내 무명제약회사 제품을 제시하며 심사과정에서 보험료를 매섭게 삭감해왔다. 과잉청구와 과잉진료를 한다며 의료계를 매도해 온 것이다. 행정당국의 이런 입체적 압박이 오늘날 우리 의료계의 서글픈 현주소이다.

여기서 최대의 피해자는 누구일까. 국민에게 최고품질의 약을 못쓰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저질 약품을 간접적으로 강요한 행정당국은 국민 앞에 어떻게 사죄 또는 변명할까. 그동안 약품의 질을 철저히 감독했어야 할 식약청의 직무유기는 국민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까. 이는 저질 약품이기에 저렴할 수 있었던 악약(惡藥)을 의료소비자인 국민에게 행정당국이 소신을 갖고 ‘괜찮다’고 주장해 온 결과이다.

정부당국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문제에 임기응변식으로 대처하지 말아야 한다. 괴롭겠지만 값싼 저질의 약을 국민에게 투입하도록 유도하지 말고 국민 부담을 현실에 맞게 늘려서라도 좋은 약을 마음놓고 쓸 수 있도록 의료소비자인 국민을 설득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본다.

이성낙(한국병원경영연구원장·아주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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