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서 증언했던 증인을 다시 검찰 조사실로 불러 받아낸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조서는 유죄판단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이번 대법원 판결의 취지.
이번 판결은 헌법이 규정한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모든 증거는 법관의 면전(面前)에서 진술, 심리돼야 한다’는 형사소송법상의 ‘직접주의’를 재확인한 것.
그러나 검찰은 증인들이 그때 그때의 이해관계에 따라 검찰 조사실과 법정에서 쉽게 말을 바꾸는 현실과 수사의 어려움을 무시한 판결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사실관계▼
김모씨(44)는 98년 변호사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됐다. 공소사실은 김씨가 96년 신용장을 이용해 사기행각을 벌인 혐의로 수사를 받던 친구 K씨로부터 “처벌받지 않도록 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교제비’조로 1억9300여만원을 받았다는 것.
이같은 변호사법위반 사건의 경우 돈을 준 쪽은 처벌규정이 없다. 따라서 K씨는 김씨에 대한 재판에서 검찰측 증인이 됐다.
98년 8월25일 열린 1심 4차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K씨는 그러나 “김씨에게 회사 운영을 맡기고 회사 운영비조로 준 것”이라며 김씨의 혐의사실을 부인했다.
검사는 그 해 10월9일 K씨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추궁했다. K씨는 또 말을 바꿔 “법정 진술은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고, 검사는 이 진술내용을 다시 증거로 재판부에 제출했다. 1, 2심 법원은 이 증거와 다른 증거를 인정, 김씨에게 1년6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대법원 판단▼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형선·金炯善대법관)는 15일 “법정증언을 뒤집은 K씨의 검찰 진술조서는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는 변호인과 김씨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대법원은 그러나 다른 증거들에 의해 김씨의 유죄는 그대로 확정, 1년6월의 징역형은 바뀌지 않았다.
이 판결은 같은 과정으로 법정에 제출된 증인의 진술조서를 유죄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인정했던 지금까지의 대법원 입장을 공식 변경하는 의미가 있다. 재판과정에 있는 피고인 및 증인을 따로 불러 압박하는 검찰의 관행이 헌법과 법률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것이다. 형사소송법 310조는 ‘법관의 면전에서 진술되지 않고 피고인의 반대신문 기회가 보장되지 않은 진술은 원칙적으로 증거 능력이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문제의 증거가 유죄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되느냐 여부는 차치하고 아예 증거의 형식적 자격조차 없다는 얘기다.
검찰에서의 진술조서는 증인이 제대로 읽고 서명 날인한 것임이 법정에서 확인될 경우 증거능력이 인정되나 일단 재판이 시작된 후에는 ‘검찰 조사실’이 아닌 ‘법정’에서 모든 증거를 드러내라는 것이 대법원의 주문이다.
▼검찰 입장과 전망▼
이 판결에 대해 검찰은 “이제 법정에서 위증하는 증인은 모두 위증 혐의로 입건해 조사하거나 검찰에서 번복 진술한 증인을 모두 법정에 다시 세우는 번거로움을 겪게 됐다”며 반발하고 있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이번 판결은 업무가 폭주하는 상황을 무릅쓰고 실체적 진실을 발견해야 하는 검사들의 업무 현실을 도외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창권(池昌權)대법관 등 5명도 “검사가 증인을 다시 불러 조사한 이유나 내용 등을 불문하고 일률적으로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고 반대의견을 냈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