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붕괴 대책은?]수준별 수업-평가등 백년대계 시급

  • 입력 2000년 7월 5일 18시 22분


서울 D고는 영어와 수학과목의 경우 학생들을 학력에 따라 A, B반으로 나눠 수준별 수업을 한다. 이 학교 1학년생 ‘열등반’이 쓰는 교재는 중학교 1학년 영어 교과서. 아무리 학력이 떨어지더라도 고교 1년생의 이해력이 중학교 1년생보다는 낫지만 적합한 교재가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 중 상당수는 중학교 영어교과서로 공부해야 한다는 점이 마냥 불안하기만 하다. 대학입시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는 학교생활기록부의 과목별 학년 석차를 매기려면 저학력자나 고학력자나 모두 같은 시험지로 시험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 열등반 학생들은 중학교 교과서로 공부하다 시험이 다가오면 고교 교과서를 꺼내들고 공부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이 학교 영어교사 윤모씨(43)는 “학생들에게 죄를 짓는 느낌”이라며 “열등반 학생들을 충실히 가르칠 수도 없고 우등반 학생들도 2, 3단계의 수준 차가 있어 제대로 된 수업을 못한다”고 말했다.

이 학교만 해도 사정이 나은 편. 대부분의 학교는 명백히 학력 격차가 있는 학생들을 한 교실에서 가르친다. 해당 학년에서 규정된 과정을 마친다는 형식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지금까지 학력(학업 성취도)을 관리하는 시스템은 전무했다. 그동안 몇차례 학력평가시험이 치러지긴 했으나 평가주체가 몇 년마다 바뀌고 시험도 일정한 기준이 없이 출제돼 학력 비교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그 결과가 발표되지도 않았다. 초중고교 교사들과 전문가들은 정확한 학력 평가가 이뤄지고 또 발표되길 원하고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지난달 28일 치른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는 이같은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첫 시도이지만 최소한 몇 년간의 결과가 비교되어야 학력의 추이를 알 수 있어 당장 ‘학력 붕괴’를 진단할 수 없는 지경이다.

교육 당국은 이같은 문제가 올해부터 시작돼 2004년 고교 3학년까지 확대되는 제7차 교육과정에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장담한다.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교과별로 ‘보충-기본-심화’라는 수준별 교재와 이에 따른 수업이 이뤄진다는 것.

7차 교육과정을 위해서는 교사나 교실이 현재보다 크게 늘어나야 한다. 새 교과과정 실험학교로 지정됐던 서울 양재고는 “학급당 인원이 현재 50여명에서 30명 안팎으로 줄어들어야 하고 고교 2, 3학년의 79개 선택과목을 가르치려면 교사가 많아야 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각 초중고교가 충분한 시설을 갖추고 기초학력을 책임지는 교육을 한다면 끝없는 학력 붕괴는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각 고교에서 전체 학생을 기준으로 한 평가가 아닌 수준별 평가를 실시해야 하고 대학은 이를 입학전형에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교육부는 새 교육과정을 위한 시설 확충을 위해 4조7000억원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예산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다.

시설을 위한 돈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교육의 핵심 요소는 학생과 교사의 대화다. 교사는 이미 학습능력을 잃은 학생에게 질렸고 학생은 교사를 귀찮은 존재로 치부하는 현실을 타개하는 것이 급선무다. 전문가들은 교육 당국이 교사와 학생의 관계 개선 등 ‘소프트웨어’ 개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문한다.

서울대 김신일(金信一)교수는 “교육이 국가주의적인 지배구조를 갖고 있어 현장의 변화가 국가 정책에 반영되지 못했다”면서 “학생지도법 등 다양한 교육의 소프트웨어가 개발되지 않는 한 학력 붕괴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교육의 붕괴를 막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준우기자>ha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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