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절망처럼 나의 기대도 항상 빗나가고 말았다. 무언가 보다 나은 길이 보이는데도, 항상 가식의 방식을 택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도처에 깔려 있다. 대개는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용서가 되지만, 비판의 여지를 남길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다.
98년 5월 지방선거를 앞둔 정당 연설회에서 한나라당 김홍신의원이 대통령을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흥분한 여당은 대통령의 이름으로 김의원을 고소했고, 법원은 유죄를 선고했다. 당시 내가 기대했던 결말은 그게 아니었다.
대통령이 이렇게 한마디하면서 종결됐으면 멋있겠다 싶었다. “진실한 말은 결코 아름다울 수는 없습니다. 김의원의 말에 비록 대통령으로서 자존심에 상처는 입었습니다만, 그동안 제가 한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한 부분이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저는 한때 거짓말쟁이였습니다만, 앞으로는 가장 정직한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가식 버리고 진실 택해야▼
탤런트 서갑숙씨가 성체험 고백서를 낸 것이 출판사의 기획 의도와 맞아떨어져 베스트셀러가 됐다. 보기 드물게 저자의 기자회견이 열렸고, 질문 공세는 상업적 의도에 집중됐다. 물론 서씨는 단호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관심 있는 구경꾼으로서 내가 기대했던 대답은 이렇다. “책이 잘 팔리기를 바라지 않는 저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제 책이 많이 팔려 돈도 벌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 책을 쓴 목적은 아닙니다. 성에 대한 숨김없는 태도가 집필 동기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애당초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검찰 역시 단 한번도 우리를 흡족하게 해주지 못했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시집이나 여러 곳에서 상영한 영화를 세상의 분위기와 관계없이 이적표현물이라고 고집한다. 최근에는 94년에 기소한 ‘한국사회의 이해’의 저자 경상대 정진상 장상환교수에 대해 징역 2년을 구형했다. 오직 기소와 무죄에 대한 항소만이 검찰이 할 수 있는 일이라 믿고 있다. 잘못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던지는 공소취소도 의사표시의 한 방법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사상 최초의 인사청문회가 연거푸 벌어졌다. 총리야 전문적인 정치인이므로 그렇다고 제쳐두더라도, 대법관의 경우는 다르리라고 기대했다. 기대는 두 가지 근거에서 가능했다. 첫째, 사법부 최고의 자리에 추천된 인물들인 만큼 정치적 고려를 가급적 자제하고 솔직할 것이다. 둘째, 자신의 잘못을 드러낸다 해도 치명타가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하게 끝났다. 그리고 무난히 국회 동의를 얻었다. 나아가 별다른 과오 없이 임기를 채우려고 노력할 것이고, 필경 그렇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 대법원의 평화로운 모습이고, 그만큼 일시나마 솟아올랐던 우리 기대의 흥분치는 가라앉혀야 한다.
아마도 한때 나의 상상력은 현실을 너무 멀리 벗어났던 모양이다. 프랑스의 드레퓌스사건은 역사가 무죄를 선고하고 재심 법원이 거기에 따랐지만, 우리의 강기훈씨 유서대필사건은 거꾸로 되어 있다. 이 사건에 관련된 대법관 후보가 국회 표결에 앞서 청문회장에서 용감하게 사퇴했더라면 너무 극적이었을까.
▼청문회 의원들도 너무 무심▼
“비록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지만, 이 사건의 결과를 신뢰하지 않는 국민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저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대법관은 제도가 부여한 최고의 영예이지만,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여기서 물러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진실이 주는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보자들에게 이런 허망한 기대를 잠시나마 해 본 것은, 청문회와 표결에 임하는 의원들이 너무 무심했기 때문이다. 여당의 원내총무는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부담을 고려해 찬성표를 던지라고 독려했다는 후문이다. 당론으로 정한 국가보안법 개폐에 영향을 미칠 만한 후보자는 없는지 검토해 보았는지 묻고 싶다.
대법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대법관의 임명동의 절차를 지켜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허위와 진실을 둘러싼 혼란을 벗어나는 일이라고 확신한다. 앞에서 든 시에서 ‘너’가 누구와 무엇을 가리키는지 깨달아야 한다.
차병직(변호사·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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