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전 서울고법 11층 형사5부 판사실에서 만난 정진경(鄭鎭京·37·사시27회)판사는 의외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정판사가 최근 법원 통신망의 게시판에 띄운 글이 법조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대법관 임명제청 방식의 개선을 바라며’라는 제목으로 된 장문의 이 글은 대법원장이 아무 공론화 과정없이 대법관 후보자를 지명하는 현 관행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스스로도 국민에 의해 직접 선출되지 않아 민주적 정당성에 한계를 가지고 정치권력의 영향을 받기 쉬운 대법원장이 독자적으로 대법관 후보자를 지명하는 것은 대법원장을 통해 사법부의 독립이 위협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그는 전제한다.
결국 대법원장은 대법관을 임명제청하기 전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토론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그래야만 사법부가 국민과 사법부 구성원의 지지와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행 헌법은 대법관 임명과 관련해 대법원장이 대통령에게 후보자를 임명제청하고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헌법 규정은 72년 유신헌법 이후 생긴 것으로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됐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재야의 비판을 받아왔다.
정판사는 구체적으로 ‘법관추천회의’의 설치를 건의했다. 경력 10년 이상의 법관 50%, 변협 검찰 법학계 시민단체 등 외부기관 대표 50%로 해서 모두 30∼50명으로 구성된 이 회의에서 공론화를 거쳐 대법관 후보를 선정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훌륭한 대법관을 뽑는데 왜 꼭 지금처럼 지역 안배나 기수 안배가 필요한 것인지 납득하지 못하는 판사들이 많았습니다. 법관으로서 할 말은 해야 되겠죠.”
그도 물론 조직 수장의 인사권에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심사숙고 끝에 올린 글은 단번에 법원내의 논란을 불러왔고 지금까지 판사와 일반 직원 등 2000여명이 글을 조회했다.한 부장판사는 “현 대법원장도 나름대로 객관적인 인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반박문을 게재했고 몇몇 일반직원들은 “판사님 힘내세요”라는 메일을 보내오기도 했다.
정판사는 자신의 주장이 현 수뇌부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 아님을 거듭 강조했다.
대법원은 “사법제도에 대한 의견중 하나로 생각한다”며 공식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