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 단독 대법관제청 문제많다" 현직판사 공개비판

  • 입력 2000년 7월 13일 19시 10분


“현재의 대법관 임명 시스템은 사법부의 독립과 권위를 지키는 데 적절하지 않으며 이 문제에 대한 사법부 구성원과 국민의 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글을 썼습니다.”

13일 오전 서울고법 11층 형사5부 판사실에서 만난 정진경(鄭鎭京·37·사시27회)판사는 의외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정판사가 최근 법원 통신망의 게시판에 띄운 글이 법조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대법관 임명제청 방식의 개선을 바라며’라는 제목으로 된 장문의 이 글은 대법원장이 아무 공론화 과정없이 대법관 후보자를 지명하는 현 관행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스스로도 국민에 의해 직접 선출되지 않아 민주적 정당성에 한계를 가지고 정치권력의 영향을 받기 쉬운 대법원장이 독자적으로 대법관 후보자를 지명하는 것은 대법원장을 통해 사법부의 독립이 위협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그는 전제한다.

결국 대법원장은 대법관을 임명제청하기 전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토론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그래야만 사법부가 국민과 사법부 구성원의 지지와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행 헌법은 대법관 임명과 관련해 대법원장이 대통령에게 후보자를 임명제청하고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헌법 규정은 72년 유신헌법 이후 생긴 것으로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됐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재야의 비판을 받아왔다.

정판사는 구체적으로 ‘법관추천회의’의 설치를 건의했다. 경력 10년 이상의 법관 50%, 변협 검찰 법학계 시민단체 등 외부기관 대표 50%로 해서 모두 30∼50명으로 구성된 이 회의에서 공론화를 거쳐 대법관 후보를 선정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훌륭한 대법관을 뽑는데 왜 꼭 지금처럼 지역 안배나 기수 안배가 필요한 것인지 납득하지 못하는 판사들이 많았습니다. 법관으로서 할 말은 해야 되겠죠.”

그도 물론 조직 수장의 인사권에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심사숙고 끝에 올린 글은 단번에 법원내의 논란을 불러왔고 지금까지 판사와 일반 직원 등 2000여명이 글을 조회했다.한 부장판사는 “현 대법원장도 나름대로 객관적인 인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반박문을 게재했고 몇몇 일반직원들은 “판사님 힘내세요”라는 메일을 보내오기도 했다.

정판사는 자신의 주장이 현 수뇌부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 아님을 거듭 강조했다.

대법원은 “사법제도에 대한 의견중 하나로 생각한다”며 공식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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