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 백련(白蓮) 가득한 인취사 연못가에 붉은 색 연등이 하나 둘 불을 켜면 이곳은 말그대로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가 된다. 연꽃속에 얼굴을 묻는다. 전해오는 이 향기를 ‘은은하다’는 말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주지 혜민(惠民)스님은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가르치실 때 묵묵히 연꽃을 드니 가섭존자만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는 얘기가 떠오른 듯 “연꽃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지는 무진법문(無盡法文)”이라고 불렀다.
시민단체 ‘맑고 향기롭게’ 등이 주관한 사찰생태문화기행을 따라 인취사를 찾은 것은 21일. 학성산(鶴城山) 자락 절 입구에 이르자 ‘하마(下馬)’라는 표지가 나타난다. 진입로를 가로막은 쇠줄 하나는 이 자그만 산사의 일주문(一柱門)인 셈. 불교중앙신도회 한정갑 문화부장으로부터 임금도 일주문에서는 가마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대웅전 코앞까지 차가 오르내리는 대형사찰의 현실을 떠올린다.
경내 길가에는 목련나무가 늘어서 있다. 자생식물 전문가 권오분씨는 “우리가 흔히 보는 것은 중국 목련인데 반해 이 나무는 한국 목련”이라며 “꽃이 상대적으로 작은 게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혜민스님이 30년전 이곳에 왔을 때 심은 이 나무의 열매는 겨울철 새들의 먹이가 되고 그 새들이 싼 똥에 든 씨앗이 퍼져 반경 600∼700m 이내는 한국 목련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생명은 연기(緣起)인가 보다.
절 안팎에는 어릴적에만 해도 흔했는데 지금은 보기 힘든 깽깽이풀 딱총나무 산작약 등이 눈에 띈다. 자생종인 옥잠화와 외래종인 비비추도 설명을 들으니 금방 구별된다. 사방에 지천으로 핀 개망초. 권씨는 “본래 외래종인 개망초는 농부들을 가장 괴롭히는 잡초”라며 “어린 잎은 시금치보다 영양가가 많으므로 먹어서 없애자”고 농담반 진담반 말한다. 칡넝쿨에 피는 보라색 꽃은 말려서 달여 먹으면 아주 향기로운 차가 된다는 상식도 배운다.
극락전앞의 요사(寮舍)는 낡고 초라한 채로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해우소(解憂所)는 옥잠화가 멋지게 바닥을 두르고 있다.
혜민스님은 “산이 높고 골이 깊으면 절이 크고 산이 낮고 골이 얕으면 절이 작은 법”이라며 큰 건물을 짓고 큰 불상을 모시는 대신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더 심는 것을 불사(佛事)로 삼고 처사 한명과 함께 백련을 키우는 연못을 가꿔왔다. 잠자리 메뚜기 등 온갖 곤충이 찾아들고 흰백일홍 청포 등과 이름 모를 들꽃도 자라고 있다. 연못을 둘러보는 이들은 굳이 법문을 듣지 않아도 아름다운 연꽃에서 불국토를 상상하며 저절로 환희심(歡喜心)이 이는 것을 느낀다.
‘맑고 향기롭게’의 김자경 기획실장은 “90년대의 단순한 문화기행에서 소홀히 다뤄진 생태의 문제를 부각시킨다는 의미에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생태문화기행을 실시할 계획”이라며 “다음 행사는 10월 7∼8일 영주 부석사와 문경 봉암사에서 열 예정”이라고 밝혔다.
<아산〓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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