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트 여사는 지난달 25일 일과 삼아 해오던 산책을 마친 뒤 심장발작을 일으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소생하지 못했다.
홀트 여사가 창립한 홀트아동복지재단은 그간 1만8000여명의 한국 고아들의 국내입양을 알선하고 7만여명을 외국인 가정에 입양되도록 도와준 대표적 고아구호기관. 홀트 여사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한국의 혼혈 고아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것이 계기가 돼 남편과 함께 고아입양사업을 시작했다. 여사의 남편 해리(1964년 한국에서 별세)는 당시 목재사업으로 큰돈을 벌었으나 심장마비로 죽음 직전까지 가는 체험을 한 뒤 ‘여생을 주신 신께 보답하자’는 생각으로 고아 입양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미 6명의 친자식을 기르고 있던 홀트 여사 부부는 1955년 8명의 한국 고아를 미국으로 데려가 키우기 시작했다. 당시 미 난민구호법은 한 가정에 2명까지만 입양을 허용했지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홀트 여사 부부에게만 예외를 인정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홀트 여사는 입양한 자녀들이 미국생활에 성공적으로 적응하자 입양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녀는 “친부모가 됐든 양부모가 됐든 아이들은 1 대 1의 사랑을 받아야 행복할 수 있다. 아무리 고급스러운 고아원도 가난한 가정만 못하다”는 믿음으로 고아를 대했다. 자기 핏줄이 아니면 기르려고 하지 않는 거부감을 조금만 누그러뜨리면 많은 고아들이 좀더 나은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한국인들을 타이르기도 했다.
여사의 입양 사업은 러시아 중국 브라질 필리핀 베트남 인도 태국 루마니아까지 확대됐다. 그러나 입양 사업이 항상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업 초기 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 100여명이 폐렴으로 숨져 두고두고 그녀를 안타깝게 했다.
‘홀트 할머니’ 또는 ‘그랜마 홀트’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홀트 여사의 자애로운 모습은 고아에 대한 인류애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테레사 수녀도 받았던 키스와니 세계 봉사상을 받았다. 한국정부도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모란장을 수여해 그녀의 사랑을 기렸다.
그녀의 딸 말리 홀트(63)도 부모의 뜻을 이어받아 한국에 머물며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여사도 1일 조문을 보내 “나 자신도 홀트국제아동복지회와 함께 일한 적이 있다”며 “홀트 여사는 ‘사랑의 입양’을 실천하기 위해 국경과 인종의 장벽을 넘었던 위대한 개척자였다”고 추모했다.
홀트 여사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7일 국내로 운구되며 장례식은 9일 오전 10시 경기 고양시 탄현동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홀트아동복지회장으로 치러진다. 여사는 복지타운 내 남편의 무덤 곁에 묻힌다.
한국내 빈소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 홀트아동복지회관과 홀트일산복지타운내 기념관에 마련됐다. 02―332―7501∼4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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