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은 이번 폐업의 주된 이유 중 하나가 현재의 의약분업안이 의사의 진료권을 현저히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의약분업의 기본 취지는 ‘진료는 의사에게, 조제는 약사에게’지만 의사들은 이를 전혀 믿지 않는다
개정 약사법에서는 의사가 환자에게 투약할 권리는 법적으로 금지시키면서 약사가 환자에게 증세를 묻고(불법 진료) 처방전 없이 일반약을 낱알로 섞어 파는(임의조제)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 의사의 처방약 목록을 600여개로 제한했다든지 환자 동의를 거치게 했던 대체조제(의사의 처방약과 성분이 같은 다른 약으로 조제) 관련 규정이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통보에 그치도록 바뀐 점도 진료권을 침해하는 내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울대 의대 허대석(許大錫·내과)교수는 “의사 업무 중 하나이던 조제권이 약사에게 넘어가면서 임의조제와 대체조제를 현실적으로 허용했다”며 “현재의 의약분업, 의료 환경 속에서는 의사의 진료권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의료계의 진료권 보장 요구는 기본적으로 약국 조제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다.
지방의 한 동네의원에 소변이 나오지 않고 아랫배가 불러온 한 전립선 비대증 환자가 찾아왔다. 소변을 뽑았더니 1300㎖가 나왔다. 소변 배출구가 막힌 것인데 약국에서 라식스라는 이뇨제를 주어 소변을 더욱 많이 만들었다. 전공의 비상대책위원회가 내놓은 사례 중 하나다.
약국의 진료가 성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는 해방 후 의사 수가 모자라 약사가 진료 행위를 했고 국민은 병원의 복잡한 절차를 싫어하기 때문에 병원보다는 약국을 찾았다. 이 때문에 약국이 ‘1차 진료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의사 수가 충분해 약사가 진료권을 가질 이유가 없어졌다.(연세대의대 내과 한광협·韓光協교수)
의료계는 진료권 확보를 위해 우선 △일반 의약품의 최소 포장 단위를 30알로 해 약 구입 비용을 높여 환자들이 불편하더라도 병의원을 거쳐 약을 먹도록 하고 △5개월간 약국의 일반 의약품 낱알 판매를 허용한 조치를 철회하고 △약국의 끼워팔기에 대한 처벌 조항을 추가하는 방향으로 약사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의료계는 특히 이 같은 진료권 침해가 국민의 건강권 침해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약사의 불법 변경조제 대체조제 등으로 환자의 건강이 나빠지거나 약화 사고가 발생하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것. 또 수가 청구에 대한 부당한 간섭으로 진료권을 침해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서울 강서구 내과 개원의 박형근(朴亨根)씨는 “환자에게 비싼 약을 써 건당 진료비가 높아지면 정부가 의보재정 고갈을 이유로 각종 제재를 가한다”며 “에쿠스라는 고급차까지 나왔는데 엑셀만 타라고 강제하는 꼴이고 이는 곧 환자의 건강에 직결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의 생각은 다르다. 보건복지부는 약사들의 불법 변경 조제나 대체조제, 끼워팔기 등은 약사법에 제재 규정이 있으며 또 ‘삼진아웃제’가 적용돼 약국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불법행위가 적발되면 일벌백계로 다룰 것이라고 밝혔다. 또 약품수를 600개 품목 내외로 한 것과 관련해 95% 가량은 그 정도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안효환·安孝煥약무식품정책과장)
그동안 약사가 동네의사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던 의사들이 약가마진이 없어지고 의약분업이 실시되자 진료권 보장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도 많다. 서울 마포구 도화동 B약국의 약사는 “처방전을 보면 왜 이런 약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들만큼 싼 카피약을 처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의사협회 김방철(金方喆)보험이사는 “국제보건기구(WTO)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의료 수준은 세계 58위로 말레이시아 태국보다도 낮고 그나마 민간 투자에 이뤄진 것”이라며 “의료계를 비리의 온상으로 내몰지 말고 개혁의 주체로 세워 달라”고 주장했다.
<정용관기자>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