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한 남자가 서울시내 한 경찰서에 불쑥 나타나 두 손을 내밀었다. 16세 때 가출한 뒤 노동판을 전전하며 막일을 해왔다는 백모씨(40)였다.
깜짝 놀란 경찰관이 확인해 본 결과 백씨가 죽였다는 사람은 ‘외상과 타살흔적이 전혀 없어 지병으로 자연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변사처리’돼 있었다.
그가 털어놓은 5년 전의 일은 이랬다. 95년 9월 술을 마신 뒤 서울 성북구 정릉동 E요양원 마루에 누워 있었던 백씨는 박모씨(당시 68세)가 “젊은 사람이 왜 술에 취해 여기 누워있느냐”며 잔소리를 하자 순간적으로 화가 나 부엌에 있던 식도를 들고 나와 박씨에게 대들었다. 평소 고혈압이 있던 박씨는 백씨가 칼을 휘두르자 정신적 충격을 받아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곧 숨졌다.
상황을 잘 모르는 주변사람들의 얘기를 토대로 경찰은 ‘변사’로 처리했다. 백씨는 그후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는 것.
97년 주먹을 휘두른 혐의로 1년반 가까이 교도소생활을 했지만 죄값을 치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경찰서를 찾았다는 것이다.
폭행치사 혐의로 구속기소된 백씨는 재판부에 반성문을 냈다. “인생에서 최고로 중요한 이 시점에 양심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남에게 피해만 주며 살아온 과거를 생각하면 너무 괴로워 이것을 이겨야만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울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장 김대휘·金大彙부장판사)는 31일 백씨에 대해 징역1년을 선고했다.
이는 법이 허용하는 최저의 형량. 재판부는 “백씨가 칼을 휘두른 것은 몸에 닿지는 않았더라도 법률상 폭행으로 인정되고 그 결과 박씨가 사망하게 된 만큼 백씨는 유죄”라며 “그러나 묻혀버릴 뻔한 사건에 대해 자수했을 뿐만 아니라 깊이 반성하고 있으므로 법정형량을 2번 감경해 가장 짧은 형량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눈물을 흘리는 백씨에게 재판장은 “교도소에서라도 새 삶을 시작하라”고 당부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