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충남 연기 한학자의 집에서 태어난 남정은 1940년 일본에 유학중이던 종형(從兄)이 보내준 그림도구로 화필을 잡기 시작, 청주상고를 졸업한 뒤인 18세 때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돼 본격적으로 미술수업을 시작했다.
서울대 회화과에 1회 입학한 그는 청전외에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등 기라성 같은 교수진을 통해 세상에는 서양화와 서양화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원 오원 이당 등 훌륭한 우리화가와 전통 그림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를 특히 아꼈던 청전은 그림을 지도하면서 늘상 “나는 이렇게 그리지만 너는 반드시 네 그림을 그려야 한다”며 독자적인 길을 걷도록 일깨워 주었다. 남정의 초기작품이 산수에 일가를 이뤘던 스승과는 달리 인물에 치중해 있고, 70년대 들어서는 동양화의 전통에서 살짝 비켜나 수묵화와 채색화를 절충한 새로운 한국화의 흐름을 만든 배경이다.
청전은 또 조금 머리가 커진 제자가 “도대체 그림이 무엇이냐”고 캐묻자 심사숙고한 뒤 “그림은 여운이 있어야 하네…”라고 말해줘 일평생 남정을 그말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원(遠)' |
회고전 개막식이 열리던 날 전시장에서 만난 남정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깔끔하고 단아했다. 그림이 곧 사람이라면 이는 남정을 가르킨 말일 것이다. 그가 정년을 10년이나 남긴 55세때 서울대 미대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 것도 자신에게나 그림에게 지극히 엄격한 일면을 보여준 일화로 기억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남정의 이런 일면을 가리켜 ‘차고, 근접하기가 어려운 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가까이서 본 남정은 그러나 다정다감하면서도 선비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전시장에 들른 은사 월전(88)도 깍듯이 모셨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마다 옛 선비들의 ‘화론(畵論)’를 곁들였다.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됨의 연장선에서 그림을 대해온 탓일 것이다.
“그림이란 무엇을 담든 화가가 제 모습과 제 가슴속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화가는 자신의 마음을 화면에 내놓는 것이지요.”
“화가의 가슴에 ‘무’의 세계가 형성되어야 ‘유’가 나오는 것입니다. 기교가 지나치면 안됩니다. 기교에 치우친 그림은 일순간 대중의 찬사를 받을지는 몰라도 안목있는 사람은 금방 식상해 버립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림을 내놓을 때는 제 멋에 겨워 생각없이 만든 만든 것을 내놓아서는 안되고, 반드시 격조와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30년 넘게 서울 종로구 옥인동의 고택에 살면서 요즘도 자신이 회원으로 있는 예술원의 회원전과 심사위원등으로 간여했던 서울시미술대전등에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작품을 내느라 한해에 너댓점씩 대작을 그린다. 국전에도 49년부터 단 한 차례도 빼뜨리지 않고 출품했다.
남정이란 호는 20대 후반 서예가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이 지어준 것으로 ‘푸른빛’ ‘가람’ ‘변치 않는 마음’ 등의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소전은 이 호를 적어주면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고어를 의식해 “청전이 싫어하겠구만…”이라고 농을 했다고 한다.
<오명철기자>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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