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국내 정유사들에 천문학적인 과징금을 부과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석유시장 관계자들은 대부분 “정유사들의 독과점적 횡포를 근절할 수 있는 획기적 계기”라는 반응이었다.
주무 행정부처인 산업자원부는 이번 공정위 결정을 계기로 그동안 정유사 입장이 과도하게 반영되어 온 석유 정책에 가시적 변화가 일 것으로 내다봤다. 산자부 관계자는 “11월에 완성될 에너지경제연구원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연말엔 유가 산정 기준에도 변화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본보의 석유시장 시리즈와 관련, 정유사와 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유가공동조사단’의 구성을 촉구했던 참여연대 윤종훈(尹鍾薰)회계사는 “공정위의 이번 결정은 정유사들의 독과점 구조가 문제 투성이였음을 정부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며 “앞으로 유가 산정 방식을 투명화해 국민 부담을 덜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국회 산자위 의원들은 제도 개선책 마련을 촉구했다. 민주당 김방림(金芳林)의원은 “의혹 덩어리인 석유 시장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선 전자상거래 등을 조속히 도입, 다수가 참여하는 유가 결정 구조를 만드는 게 급선무”라고 주장했다.주유소협회의 한 관계자도 “그동안 정유사들은 상처 하나 입지 않던 공룡이었다”며 “주유소들도 이번 기회에 석유 유통 질서를 정상화하는데 앞장서야 소비자들에게 외면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한편 정유사측은 “군납 유류시장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조치”라며 “충격적이다 못해 다소 멍한 기분”이라는 분위기. SK 관계자는 “정유사 관계자들이 만났다는 진술을 근거로 천문학적 과징금을 때린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어떤 식으로든 이의신청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승헌기자>ddr@donga.com
▼과징금 산출 어떻게▼
액수(일자) | 대상업체 | 위법내용 | |
1 | 1,901(2000. 9.28) | SK LG정유 현대정유 S-Oil 인천정유 | 98,99,2000년도 군납 유류 입찰 담합 |
2 | 790(1999.10.28) | 삼성 현대 대우 LG SK소속 57개 회사 | 기업집단 계열사의 부당지원행위 |
3 | 704(1998. 8. 5) | 삼성 현대 대우 LG SK소속 80개 회사 | 기업집단 계열사의 부당지원행위 |
4 | 267(1999.11.12) | 삼성전자 LG 대우전자 만도기계 대우캐리어 센츄리 범양냉방공업 두원냉기 한국냉동공조공업협회 | 8개 에어컨업체와 한국냉동공조공업협회 간의 납품 담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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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209(1998.11.19) | 삼성 현대 대우 LG SK소속 32개 회사 | 기업집단 계열사의 부당지원행위 |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22조는 부당한 공동행위(담합)를 한 기업에 대해 ‘관련품목 매출액의 5%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법 시행령 61조는 이를 구체화해 위반행위의 내용과 정도, 기간과 횟수, 부당행위로 얻은 이익규모 등에 따라 과징금 액수를 가감할 수 있도록 했다.
공정거래위가 98∼2000년 군항공유 입찰과정에서 담합한 국내 5개 정유사에 대한 과징금 부과에서 특히 주목되는 대목은 과징금 산출의 토대인 ‘매출액’의 산정방식.
공정위는 각 정유사에 대해 각각의 낙찰금액이 아닌, 5개 정유사 전체의 낙찰금액(7128억원)의 5%를 과징금으로 산출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정유5사가 입찰에 앞서 모임을 갖고 전체 입찰물량을 나눠갖기로 담합한 것이기 때문에 이 전체 담합물량을 근거로 과징금을 산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인천정유는 정작 2000년 입찰에선 빠졌지만 담합에 가담한 ‘죄’로 입찰회사와 같은 수준의 제재를 받았다.
공정위는 조사에 협조한 LG와 S―Oil에 대해 과징금의 3분의1을 경감하는 대신 조사를 ‘방해’한 SK 현대정유 인천정유에 대해선 재량권에 따라 과징금의 3분의 1을 가중했다.
<이헌진기자>mungchii@donga.com
▼공정위 결정과정▼
“목을 걸고 조사하라.”
국내 정유 5사에 대한 공정거래위의 조사가 시작된 7월5일. 전윤철(田允喆) 당시 공정거래위원장(현 기획예산처장관)이 조사지휘를 맡은 오성환(吳晟煥)경쟁국장에게 던진 주문이다.
그 뒤 최종결론이 내려진 28일까지 공정위는 ‘공룡’ 정유사들과 85일간 ‘전쟁’을 치렀다.
▽정유업계의 ‘오리발 작전’〓공정위는 특별조사팀을 구성했지만 정유사측은 한달 넘게 “담합은 없었다”고 부인해 좀처럼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정유사측은 이미 입찰관련 서류를 대부분 파기한 상태였고 7월 중순 한 정유사가 담합관련 파일을 담은 컴퓨터를 폐기중이라는 제보를 입수하고 출동하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조사팀의 한 관계자는 “한 정유사는 건장한 직원들을 내세워 우리를 쫓아내기도 했다”며 “수사권 없이 행정조사만으로 증거를 찾아내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조사과정에서 한 정유사 상무 S씨는 조사도중 “몸이 아프다”며 귀가해버렸고 다른 정유사 L차장은 돌연 휴가를 떠나버렸을 정도.
조사팀은 정유사의 전현직 임직원들을 상대로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수차례 모여 예정가격 등을 미리 정했다”는 진술을 확보하며 조사의 물꼬를 텄다.
▽“원래는 1211억원이었다”〓28일 공정위 전체회의에서 실무자는 1211억원의 과징금 부과와 정유사 대표이사 등 20여명에 대한 검찰 고발을 건의했다.
하지만 공정위원들은 “대표이사들이 담합에 참여한 구체적 증거가 없다”며 고발에 난색을 표해 한때 난항을 겪었다.
결국 전체회의는 조사를 방해한 SK 등 법인을 검찰에 고발하는 대신 과징금을 법정 최고한도(1901억원)로 물리기로 최종 결정했다. 그 차액 700억원이 개별적인 고발을 면한 대가인 셈.
<이승헌기자>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