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지하철역 '名詩감상' 흉물 방치

  • 입력 2000년 11월 22일 19시 03분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초역 개찰구 안으로 들어서면 웬만한 사람이면 알 만한 시조 한 수가 벽면에 걸려 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조선 개국 직후 사림의 대부 길재 선생이 쇠락한 고려왕조의 흔적을 둘러보며 역사의 무상함을 노래했던 시조였다.

그러나 시조의 관리 상태는 600년 전 망한 고려왕조의 잔해를 방불케 한다. 비닐 표지 한 쪽이 찢겨진 곳을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놓은 것도 ‘꼴불견’이지만 비닐 표지 안 활자 색깔도 누렇게 바래 지나가는 승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한 역무원은 “오래 전 본사에 시 게시물을 바꿔달라고 요청했지만 아직까지 교체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지하철 1호선 시청역 안도 사정은 마찬가지. 성북 방향 통로에 붙어 있는 박목월 시인의 ‘청노루’ 시 게시판이 몇 년째 먼지를 수북이 뒤집어쓰고 있다. 1호선 청량리 역사 내 승강장 입구에 걸려 있는 김영랑 시인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시 게시판에도 먼지가 많이 쌓여 있기는 마찬가지. 10년째 경기 의정부시에서 시청역까지 지하철을 이용해 출퇴근하고 있는 회사원 이한림씨(37)는 “출퇴근하면서 거의 매일 시 ‘청노루’를 보아왔다”면서 “정기적으로 시가 바뀌어 걸린다면 새 시를 보는 기쁨이 상당하고, 이번에는 누구의 시일까 하는 기대감도 클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지하철 역사내 시나 속담, 명구 등이 붙어 있는 자리는 원래 상업광고용으로 제작된 게시판. 대략 10여년 전부터 빈 게시판을 채우기 위해 ‘명시(名詩)감상’코너가 생겼고, 98년 외환위기를 맞아 이 같은 공간이 더욱 늘어났다. 게시 작품은 서울지하철공사의 요청에 따라 한국문인협회가 선정한다.

그러나 공사측은 ‘명시 감상’코너의 구체적인 시행시기는 물론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지하철공사 관계자는 “계속사업으로 준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설치된 이후 일괄 교체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계획은 없다”며 “게시물 청소 등은 광고대행사에서 맡아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현황은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하철역별로 통일된 형식조차 찾아볼 수 없다. ‘명시 감상’이란 표제가 붙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없는 경우도 많아 뒤죽박죽이다.

게시 작품 선정권을 갖고 있는 한국문인협회측은 “저작권 시비가 제기될 것을 우려해 타계한 원로작가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선정한다”며 “보편타당한 작품을 고르다 보니 교과서에 실린 시들이 많은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이런 반응 때문인지 지하철 게시물을 보는 시민들의 반응은 차라리 ‘냉담’에 가깝다. 마포구 서교동에 사는 유한준씨(34)는 “지하철이 원래 좀 꾀죄죄하잖아요. 그러려니 하는 거죠”라며 씁쓸해 했다.

<정연욱기자>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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