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서 은행털이로…유학 딸 귀국비 마련하려

  • 입력 2000년 12월 8일 23시 19분


“미국에 유학간 딸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려 해도 돈이 없어 귀국을 못하고 있습니다. 파산한 사장이 돈을 구할 방법이라곤 이 짓밖에 없었습니다.”

8일 낮 12시10분경 서울 중구 S은행 명동지점에서 중소기업 사장이었던 박모씨(49·서울 광진구 자양동)가 점심시간을 틈타 이 지점 현금출납실에 들어가 6000만원을 훔치다 붙잡혔다. 서울중부경찰서는 이날 박씨에 대해 절도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박씨는 경찰에서 지난 2개월간 어엿한 중소기업 사장에서 거리를 전전하는 실업자로 전락한 과정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모 대기업 산하 건설업체의 임원으로 일하던 박씨는 98년 청소용역업체로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회사는 직원 150여명에 연간 3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고급아파트에 살던 박씨는 그해 고등학생인 외동딸을 미국으로 유학까지 보냈다.

그러나 올들어 경기가 악화되면서 용역을 받은 회사들이 줄줄이 쓰러져 청소비를 받지 못하자 그의 회사도 계속 부도위기에 몰렸다. 그의 회사는 결국 제2의 외환위기라는 말들이 실감나게 나돌기 시작한 10월경 부도가 나고 말았다. 집은 부도나기 휠씬 전에 처분한 상태여서 그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됐다. 박씨의 그 후 생활은 몰락 그 자체였다. 박씨 부부는 월세방을 전전하다 별거에 들어갔고 딸은 학비를 내지 못해 기숙사에서도 쫓겨났다. 박씨는 경찰에서 “일자리를 구하러 지방을 돌아다니다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며 “서울로 올라와 명동을 배회하다 딸에게 귀국비용이라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최호원기자>besti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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