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농촌은]수입산에 치이고… 중간상에 뜯기고

  • 입력 2000년 12월 10일 18시 30분


김장채소 주산지인 경남 창녕군 남지읍에서 밭 2000여평에 가을배추와 무 농사를 짓고있는 이모씨(44). “무와 배추의 경우 퇴비값도 건지기 어렵습니다. 운임을 빼고 나면 손에 쥘 돈이 없는 걸요”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해 한 뿌리에 500원 이상하던 무의 출하가격이 지금은 200원에 불과하고 배추 가격도 작년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남지읍에서 밭 4만여평에 단무지용 무를 재배하는 최치규(崔致奎·40)씨. “늦여름 태풍피해로 무밭의 80% 이상이 물에 잠겨 버린 데다 가격도 지난해 ㎏당 350원이던 것이 올해는 중국산에 밀려 200원에도 못미친다”며 실의에 빠져있다.

무값 폭락에 항의해 지난달 트랙터로 자신의 무밭 1000여평을 갈아엎은 전남 나주시 김태근(金泰根·54)씨는 “배추는 평당 1800∼2000원, 무는 2500원선이 돼야 원가를 건질 수 있는데 현재 거래가는 600원 수준이어서 결국 농민만 죽는 꼴”이라고 말했다.

농사지은 게 아까워 누구든지 밭에 와서 배추와 무를 그냥 뽑아가도록 하는 등 ‘인심쓰는’ 농가도 수없이 많다.

대구 북구 매천동 농산물도매시장에서 요즘 거래되고 있는 배추값은 5t트럭 1대 분에 60만∼70만원 선으로 지난해의 3분의 1 수준.

부산 엄궁동농산물도매시장에 따르면 풋고추는 10㎏들이 박스 당 1만8000원선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3만2000원)의 절반 수준이며 상추도 4㎏들이 박스 당 3500∼4200원으로 지난해 1만1000원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농민들은 올해 채소파동의 원인에 대해 재배면적의 증가와 소비둔화를 들고 있다. 최근 경기가 좋지 않으면서 각 가정의 김장량이 줄어든 데다 소비심리가 크게 위축됐다는 것. 8, 9월 채소값이 잠깐 오르자 수입업자와 김치가공업자들이 앞다퉈 중국산 수입에 나선 것도 또 다른 원인.

채소를 재배하고 있는 이모씨(55·부산 강서구 대저동 )는 “절임 배추까지 서류검역만으로 통관할 수 있는 농산물 수입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며 “채소농사 30년 경험으로 볼 때 가격안정을 위해 유통단계를 축소하고 공판장의 횡포를 근절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서울 가락동 농산물공판장의 경우 당일 수요적정량을 넘어서면 경매를 중지시키고 되돌려 보내는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데 경매에만 치중하다 보면 오전 8시를 넘어서면서부터 가격이 폭락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9월말 김장배추 7200평을 3200만원에 팔기로 하고 계약금 1200만원을 받고 대구의 수집상과 계약을 체결한 전남 영암군 농민 최모씨(43)는 최근 법원으로부터 소환장을 받고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다. 계약서에 “매수자가 잔금지불 약정을 어길 경우 임의로 처분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단서조항까지 붙었으나 수집상이 계약금을 돌려달라며 민사소송을 제기했기 때문. 최씨는 “나머지 2000만원을 다 받아도 억울한데 밭에서 배추가 썩어 가는 상황에서 계약금을 돌려 달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항변했다.

수집상들은 당초 평균 100평 기준 50만∼60만원선에 밭떼기 계약을 하고 전체가격의 30∼40%를 사전에 계약금으로 지불했으나 수확철이 되면서 평당 가격을 당초보다 30% 떨어진 35만∼45만원으로 다시 책정해 재계약하고 있다.

이들 ‘밭떼기 상인’들은 세금 한푼 내지 않고 부당이득을 챙기고 있지만 대부분의 공판장에서는 매출감소를 우려해 불법을 눈감아 주고 있는 실정이다.

전근대적인 유통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감독하에 농협이나 농산물유통공사가 농산물 수집과 통제, 물량 수급조절, 공급기능을 일원화하는 것 등이 급선무이다.

경남 합천군 율곡면 율곡농협은 올해부터 중간상인들의 농간을 차단하기 위해 산지 농민들의 신청을 받아 수집상들에게 농산물을 경매형식으로 판매하는 ‘포전 경매제(밭떼기 경매제)’를 도입해 실효를 거두고 있다.

부산 엄궁동농산물도매시장 소장을 지낸 안덕우(安德佑·현 부산 서구 사회산업국장)씨는 “경매과정에서 불합리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영 도매시장의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농산물 유통구조를 개선하는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말했다.

산지 농산물의 공동선별과 규격포장, 공동출하를 위해 각 자치단체에 설립돼 있는 ‘농산물 산지유통센터’의 활성화도 시급한 과제다. 경남도의 경우 95년부터 119억원의 예산을 들여 16개 농산물 산지 유통센터를 설립했으나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은 거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농민들의 자율적인 구조조정과 자구노력이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대구·광주·부산〓이혜만·김권·조용휘기자>ha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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