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포커스]'안티 수능'사이트 홍보담당 최성은양

  • 입력 2000년 12월 14일 19시 08분


‘교육소비자의 주권을 되찾자!’

이 도발적 격문을 초기화면에 실은 ‘안티수능 인플레이션(http://cafe.daum.net/beatkice/)’ 인터넷 사이트는 포털사이트 daum의 ‘정치’카테고리에 분류돼 있다. 10대 수험생들이 모인 커뮤니티가 정치라?

‘권력의 획득 유지 행사에 관한 현상’이 정치라는 사전적 의미에 따른다면 이들은 지금 교육소비자로서의 힘을 모으고 소리를 높이는 중이다. 11월17일 개설된 이 사이트는 14일 오후2시 현재 회원 2534명으로 ‘daum 정치카페’ 중 인기가 가장 높다. 11일엔 회원 200여명이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몰 앞에서 ‘교육소비자 권리찾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의 ‘봉기’는 디지털시대 N세대의 상징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20세기말, 일부 대학 음대 미대의 성별모집 폐지 발표때 항의농성을 벌인 주역은 학부모들이었다. 21세기엔 10대 학생들이 자신의 문제를 놓고 세상을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뜻을 모은 지 한달도 안돼 2000여명 ‘세력’을 결집하는 건 불가능했다.

사이트엔 대표가 없다. 운영진 14명 중 일원으로 홍보를 맡고 있는 최성은(崔成恩·18·경기A고)양을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이 발표된 12일 서울 강남역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나타난 그는 “엄마와 싸우다 늦었다”며 미안해했다. 성적 때문이냐, ‘안티수능’ 활동 때문이냐고 물었더니 후자라고 했다.

“엄마는 ‘전국 수험생이 80만명이나 되고 너보다 똑똑한 애들이 많은데 걔들이 이번 수능시험에 문제 있다는 걸 몰라서 가만히 있겠느냐’며 왜 네가 나서느냐고 해요. 같은 수험생 친구들도 우리가 하는 일이 옳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너희가 나선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느냐, 너희만 손해’라고 하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면 정말 마음이 아파요.”

그런데도 자신이 나선 것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였다며 ‘시험 못본 아이들의 한풀이’로 비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80년대 민주화운동도 누군가 해야 할 일이어서, 당장 사회가 바뀌지는 않더라도 조금씩 달라지기를 기대하면서 일어선 게 아닐까요.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좀더 나은 사회에서 살 수 있는 거구요. ”

머리 염색도 하지 않았고 귀도 뚫지 않은 최양은 변별력을 잃은 수능의 문제점이 계기가 돼 수험생들이 일어섰으나 그게 다는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수시로 변하는 교육제도에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어요. 지금까지는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일방적인 지시 통제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맞춰 적응하려 했죠. 그래야 대학엘 가니까. 하지만 더 이상은 안된다고 믿어요. 우리는 실험용 생쥐가 아니에요. 이번 집회를 앞두고도 우리 집행부는 수십번씩 검토를 했어요. 그런데 정부는 과연 생각을 해보고 교육제도를 바꾸는지 의심스러워요. 한번 해봐라, 문제가 있으면 또 바꾸면 된다는 식이잖아요. 교육문제는 항상 교육부 학교 학부모의 몫이라고 하는데 왜 당사자인 학생들의 목소리는 반영하지 않지요?”

이제 교육에 대해서는 당사자인 학생들도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 자신들의 입장이라며 최양은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캐나다에서 한달간 연수를 받았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수업이 환상적이었다는 얘기, 밤에 잠자려고 누우면 다음날 학교 가는 것이 기대되더라는 얘기, 늘 그렇게 공부하는 학생들과 우리나라 학생들이 어떻게 ‘게임’이 되겠느냐는 얘기….

“고교 입학 후 첫 시간에 심한 체벌을 받는 친구를 보고 너무나 충격을 받은 일이 있어요. 학생들도 인격이 있는 게 아니냐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너희가 무슨 인격이 있느냐. 학교는 너희들에게 최상의 경험뿐만 아니라 최악의 경험까지 하게 해준다. 그래서 교육적이라는 거다’라고 하셨어요. 나는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내 인권까지 포기해야 한다면 학교 다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 인권을 침해당해도 될 만한 이유는 아니라고 봐요.”

그가 초등학교때 등장해 지금도 그를 열광케 하는 서태지는 ‘교실 이데아’에서 이렇게 외쳤었다. ‘매일 아침 일곱시 삽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에 몰아넣고/전국 900만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왜 바꾸진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사이트 운영진이 만든 집회 취지문에는 ‘저희는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정당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 땅의 청소년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정치가를 꿈꾸고 있다는 최양은 “지금은 공부만 하고 나중에 ‘그들’이 앉아있는 자리에 앉아 제대로 하라”는 어른들의 말이 가슴아프다고 했다. 왜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안되는가 싶어서.

“대학 때 인권운동을 했던 어른들이 당시 자신이 당했던 일들을 우리에게 그대로 하는 걸 보며 ‘선한 개인의 합(合)이 악한 사회를 만든다’는 걸 느끼게 돼요. 내가 갖고 있는 마음이 어른이 돼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논술학원에 가야 한다는 그는 “사이트에 글을 올리면서 논술공부 많이 한다. 요즘처럼 사회와 교육, 나와 우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표현을 다듬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안티수능 활동이 대입 면접 때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솜털 보송보송한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김순덕기자>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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