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고급만 문화인가" 테크노뽕짝 가수 '이박사'

  • 입력 2000년 12월 21일 18시 45분


《엽기, 촌티, 속도, 단순, 재미…. 올해 일상문화를 지배한 키워드로 꼽히는 단어들이다. 특히 엽기는 MBC TV ‘21세기 위원회’가 6000여 네티즌에게 물어 뽑은 올 최고의 유행어. ‘괴이한 것에 흥미가 끌려 쫓아다니는 일’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사라진지 오래다. 딴지일보의 해석에 따르면 엽기란 발상의 전환, 주류의 전복, 왜곡된 상식의 회복, 발랄한 일탈로 요약되는 차세대 문화코드로 자리잡았다.》

엽기를 비롯한 올해의 키워드를 한몸에 지닌 화신(化身)이 영어로는 E―PAK―SA, 숫자를 넣으면 2PAK4, 팬들은 박사님이라고 부르는 이박사(본명 이용석·46)다. 테크노뽕짝 가수인 그를 쉽게 표현하면 ‘조용필의 딴지일보 식 버전’. 애절하면서도 비장한 정통트로트의 엄숙주의에 엽기와 촌티, 단순함과 재미를 잡종교배한 무기로 빠르게 똥침을 찔러 초등학생부터 신세대 중노년에 이르기까지 컬트적 지지를 받고 있다.

▼11년간 관광버스 안내원▼

1m60이 될까말까한 키에 45kg이 채 못되는 몸집, 미간에 어렵게 살아온 한과 슬픔이 내 천(川)자로 파인 이박사는 “내게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관광버스 안내원 11년하면서 손님들 신나게 해드리려고 노래를 한거니까요. 그 전에야 양복점 잔심부름부터 이발소 중국음식점 종업원, 구두닦이까지 안해본 일이 없었어요.”

그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버스에서 배웠다. 초등학교 졸업인 그를 오늘의 ‘박사’로 만들어준 사람을 만난 곳도 버스 안이었다.

초보 시절, 남자 안내원을 보더니 다짜고짜 “웬 남자냐. 내려라”고 하던 뚱뚱한 아줌마. 자존심이 상했지만 참았다. “그럼 노래 한곡 불러봐” 하기에 설악산까지 가면서 45명의 손님을 뽕짝메들리로 매료시켰다. 알고보니 그이는 경력이 23년이나 되는 관광단 인솔자였고 그때부터 11년 동안 ‘노래하는 이군과 버스’를 묶어 계속 일을 대주었다.

“버스에서 배운 인생 교훈이 칭찬은 욕으로, 욕은 칭찬으로 들으라는 거예요. 그래야 성공해요. 칭찬은 듣고 잊어버려야 돼. 자만에 빠지거든. 야단을 쳐주는 사람이 진짜 고마운 거야.”

노력없이 되는 일은 없다. 남이 안하는 것으로 최고가 될 생각에 트로트부터 민요까지 노래공부를 하고, 관광지에 따라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했으며, 쿵작쿵작 심심하기 짝이 없는 리듬박스 반주에다 ‘우리리리히’ ‘좋아좋아’ 하는 추임새를 넣어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들을 사로잡았다.

“나는 삶에서도 그런 추임새, 애드리브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만큼 살아보니까 산다는 건 일종의 쇼야. 쇼를 잘 하려면 우선 구성을 잘해야지. 남 모방하지 말고 자기 개성을 찾아야 해. 하지만 전깃불이 나갈 때도 있고, 무대에서 넘어지는 수도 있고, 별별일이 다 있잖아요. 그때그때 어려움을 헤쳐나갈 애드리브가 필요한 거지요.”

89년 아는 이의 소개로 ‘신바람 이박사 뽕짝 디스코 메들리’테이프를 냈다. 금방 스타가 될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 되레 밤무대 무명가수 생활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96년 다국적 거대음반사인 소니뮤직이 그를 키치문화가 만발한 일본에 데려가 화려한 쇼무대를 펼쳐줄 때까지.

이박사의 성공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만난 이율배반의 드라마라는 점에서 ‘엽기적’이다. 관광버스의 땀냄새, 전자오르간 반주에 맞춘 뽕짝 테이프, 기름바른 머리에 반짝이 양복 등 당당하게 ‘쌈마이’를 자처했던 이박사의 아날로그 문화는 인터넷, MP3, 테크노라는 디지털 문화와 맞아떨어지면서 외려 빛이 났다. 신파극 또는 B급영화 주인공처럼 촌스러운 차림으로 나와 인지도를 높인 인터넷증권사 키움닷컴증권의 CF가 이를 증명한다.

▼칭찬은 듣고 잊어야 성공▼

일본에서 히트한 그의 음반을 MP3로 퍼나른 이들은 한국의 신세대였다. 올 여름에 낸 ‘이박사 스페이스 환타지’는 13만장 팔렸고 직업도 다양한 팬클럽 회원이 국내에 10만, 일본에 8만명이다. 벤처기업에서 일하는 팬클럽회원 이종필씨(31)는 “박사님 노래를 들으면서 일을 하면 사흘밤을 새워도 피곤하지 않다”며 존경을 바칠 정도다.

“인기비결을 많이들 묻는데, 글쎄 나도 참 신기해요. 재미있으니까, 솔직하니까 좋대. 자살하려다가 내 노래 듣고 마음 바꿨다는 사람도 봤어요.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사람 기분을 맞춰준다는구먼. 꼭 고급스러워야 문화인 건 아니잖아?”

가난과 못배운 아픔이라는 자기 삶의 ‘텍스트’를 이박사는 역설적으로 신나게 해체한다. ‘스페이스 환타지’에서 “세상이 끝난다 해도 노래불러/손가락질 받아도 언제나 뽕짝…” 하며 삶에 지친 이들을 위무한다. 우울하고 답답한 정치 사회에 대해선 최근에 내놓은 윈터 테크뽕(크리스마스 캐럴) ‘산타클로스 우리 마을에 오거나 말거나’에서 처럼 “나보다 잘났을테니까 지들이 잘 알아서 하거나 말거나” 해버린다. 기자가 “당신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다 ‘그러거나 말거나’하면 어쩔테냐”고 짐짓 따지자 “나는 노래하는 사람이니까 노래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면 그것도 부조가 아니냐”고 진지하게 대답한다.

▼모방하지 말고 개성 찾아야▼

돈과 인기에 대한 집착은 없다. “내가 내려가야 다른 사람들이 올라온다. 그건 대통령도 마찬가지고 어떤 자리도 마찬가지다. 전국에 무명가수가 수천명이 있는데 언제든지 내 자리로 올라왔으면 좋겠다. 지쳐서 지레 포기하지 말고.”

노래 그만두면 이박사는 젊어서 못했던 공부를 할 계획이다. 자신이 가사를 쓴 ‘신나는 하이스쿨 로큰롤’처럼. “오늘도 신나게 학교에 가보자. 가방을 둘러메고 짠짠짠….”

<김순덕기자>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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