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변해야한다]재벌총수/'황제경영'으론 세계1등 못해

  • 입력 2001년 1월 3일 18시 46분


《정부는 지난 3년간 강도 높은 재벌개혁을 통해 선단식 경영의 연결고리인 그룹을 외견상 해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룹’은 법적 근거가 없는데도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한다. 그룹의 중심엔 ‘재벌 총수’가 있다. 소액주주 운동을 벌이는 참여연대 이승희 간사는 “총수의 지분이 평균 5%에 못 미치는데도 실제로 휘두르는 권한은 사실상 무제한”이라고 말했다. 그룹에 몸담은 기업경영인 가운데도 ‘무늬만 전문경영인’이 적지 않다. 경영인은 여러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뛰어야 한다. 경영인이 총수의 이익만을 위해 ‘예스맨’ 노릇을 하면 다른 주주들은 그만큼 손해를 보는 셈이다.》

▽‘황제경영’의 폐해〓“대우사태의 교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한 명의 스타플레이어에게 의지하는 기업은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이다.”

한 전직 대우 임원은 대우그룹 몰락의 원인 중 하나로 회장 개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총수 중심의 경영 시스템을 꼽았다. 중요한 의사결정이 김우중회장 한 사람에게 집중돼 복잡한 문제가 생기면 모두 회장 얼굴만 쳐다보는 상황. 실무진에서 무모한 사업이라고 반대의견을 펴도 김회장이 사인을 하면 그대로 진행됐다.

 신년특집 2001 변해야 한다
- 변해야 할 한국사회 7대집단 1위 정치인
- 고위관료/대통령 앞이라도 "NO" 말하라
- 재벌총수/'황제경영'으론 세계1등 못해
- 검찰/'시녀服' 벗고 법복을 입어라
- 대통령/'나홀로' 버리고 막힌 귀 열때
- 언론/'정치권 입김' 단호히 배격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재벌 총수의 독단 경영은 수그러지는 듯했다. 기업들은 앞다퉈 전문경영인 체제의 도입과 글로벌 스탠더드에 입각한 투명경영을 외쳤다. 경영실패 책임론에 몰린 총수들은 짐짓 뒷전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위기에서 벗어나 한숨을 돌리게 되자 총수를 축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황제경영’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과거 비서실을 대신해 그룹 구조조정 지원과 계열사간 연락업무를 명분으로 신설된 구조조정본부의 기능은 오히려 강화됐다.

▽실망스러운 재벌들의 행태〓기업들은 “경제성장 과정에서 기여한 공로가 큰데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항변한다. 하지만 국민이 재벌을 불신하는 데는 재벌 스스로의 책임이 크다.

일부 재벌그룹 회장들은 석연치 않은 행동으로 국민을 실망시켰다.

현대의 정씨 일가는 경영권을 둘러싼 형제간 다툼으로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현대건설 유동성 위기로 나라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다. 삼성 이건희회장이 아들 재용씨에게 재산을 물려준 과정은 ‘법의 허점을 이용한 변칙 상속’이라는 눈총을 받고 있다. LG 구본무회장 등 대주주들은 자신이 보유한 비상장사 주식을 계열사에 비싼 값에 팔아 부당이득을 챙겼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영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무한경쟁시대에서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전문경영인 체제가 확산돼야 한다”는 주장이 요즘 부쩍 설득력을 얻어 가고 있다. 이런 지적에 대해 오너측은 “그러면 소유주는 경영일선에서 퇴진하고 뒷짐만 지고 있으란 말이냐”며 반발하고 있다.

물론 전문경영인이 경영한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또 오너보다 전문경영인이 경영을 더 잘 한다는 실증적 분석도 어렵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경제학, 경영학 이론 가운데 ‘주인―대리인 이론(principal―agent theory)’이 있다. 주인이 아닌 경영인(대리인)은 회사 이익보다 자기 이익을 꾀하는 수가 많다는 것. 이런‘대리인 비용(agent cost)’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원리다. 실제로 일부 경영인은 자리 유지에 급급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전문경영인이 총수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경영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A그룹 임원은 “기업이 어려울 때는 오너가 경영일선에 나서야 강력한 추진력이 생겨 더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인권 연구위원은 “오너든, 전문경영인이든 능력 있는 사람이 경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민간경제연구소의 이사는 현대사태의 원인에 대해 “진정한 의미의 전문경영인보다 총수의 심기를 살피는 데 능숙한 가신형 경영인이 득세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내 기업에는 나중에 일이 잘못되면 책임질 것을 염려해 회사경영에 필요한 줄 알면서도 몸을 사리거나 자리 유지에 급급해 오너의 잘못된 결정에 순응하는 ‘무늬만 전문경영인’이 적지 않다는 것.

전문경영인이 제 역할을 하려면 총수의 전횡이 사라져야 한다. 이와 함께 전문경영인 자신도 대다수 주주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신광식 법경제팀장은 “경영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결과가 나쁘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전통을 만들어야 한다”며 “재벌들도 정경유착과 같은 과거의 성장패턴에서 벗어나 새로운 흐름에 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구조조정 '성공사례' 한화 김승연회장에 듣는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외환 위기에 빠졌던 3년전이 새삼 떠오른다. 그때는 거의 모든 기업들이 힘들었다. 한화그룹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금흐름이 워낙 좋지 않아 채권단의 협조융자에 의지해야 했다. 원유도입 자금이 없어 사재를 담보로 잡혀가며 밤낮으로 뛰어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IMF 위기, 그것은 분명 외형위주의 사업전략을 펴온 한국 기업들이 막대한 수업료를 내고 시대변화를 인식하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대마불사의 신화는 깨졌고 경고를 무시한 기업들은 시장에서 사라졌다.

부채비율은 높은데 수익성은 낮고, 외형만을 중요시하는 기존의 성장시스템으로는 공멸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 자명해졌다. 남은 길은 오직 하나. 강도 높은 구조조정뿐이었다. 이때부터 마취도 하지 않고 폐를 도려내는 심정으로 구조조정에 나섰다.

그룹 심장부나 마찬가지인 핵심 계열사와 우량 자산을 매각했다. 외국 기업과의 협상 때는 한국의 경제난을 틈타 헐값에 사들이려는 상대방에 맞서 한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밤늦게까지 실무진과 협상전략을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도 겪었다.

한화가 시도한 구조조정 방법은 경영학의 사례로 인용될 만큼 다양했다. 한화바스프우레탄, 한화NSK정밀, 한화GKN, 한화자동차부품 등 합작 법인의 지분매각과 함께 한화종합화학의 과산화수소 공장 등 비핵심 부문과 부동산을 처분했다. 다행히 노동쟁의 한건 없이 이뤄졌다.

구조조정 결과 97년말 32개이던 계열사는 2000년말 현재 23개로 줄었다. 1200%나 됐던 부채비율은 130%대로 떨어졌으며 전 계열사가 흑자를 내는 등 전반적인 경영지표가 호전됐다.

세간에서는 한화그룹을 구조조정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실로 과분한 칭찬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전력투구해 온 일련의 개혁 프로그램은 발등의 불을 끈 데 불과할 뿐이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한 체질개선 노력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재벌과 같은 20세기형 경영시스템은 몰락할 것이고 이제 변혁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경영시스템과 의식 행동이 따라줘야 한다. 21세기 패러다임 변화에 적응하려면 좀더 고차원적이고 치밀한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한국 경제가 다시 도약하기 위한 유일한 대안은 개혁이다. 그러나 변화나 개혁을 기업 혼자의 힘으로 해내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개혁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지원이 절실하다.

(김승연 한화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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